─이런 건 초딩들이나 보는 거 아니냐? 유치하긴.
……하고 삐딱선을 탔던 주제에, 막상 재생이 끝나고 나니 송대석은 그 유치한 만화영화를 제법 몰입해서 본 눈치였다. 집중했던 것은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월세음은 꼭 맞잡고 있던 두 손을 풀며 탄성을 터뜨렸고, 한이는 까만 화면이 아쉬운 듯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공주님 예뻤지.
─응. 그려 보고 싶어!
─생각보다 액션도 볼 만했다. 화면이 커서 그런가.
─이 몸이 설비에 꽤나 공을 들였지. 하하하! 어떠냐, 음향도 괜찮았지?
─맞아요. 꼭 영화관에 온 것 같았어요!
─음악도 좋았어. 주제곡이 특히 좋더라.
독고미로는 아이돌 지망생답게 바로 방금 들은 곡의 멜로디를 바로 기억해내 그럴듯하게 흥얼거렸다. 아이들이 손뼉을 치며 감탄하는 가운데, 목우람은 홀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레나가 불길함을 느낀 것은 바로 그때였다.
─차이콥스키도 좋았습니다만, 이야기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오로라 공주를 구하기 위해 온갖 위험을 넘어서 달려가는 필립 왕자는 정말 멋졌습니다.
─차이…… 뭐? 그게 뭐냐?
─초딩 만화에 무슨 감동…… 아악! 그린아! 잘못했어!
맹효돈이 러시아 작곡가의 복잡한 이름을 알아듣든 말든, 민그린이 말버릇 나쁜 소꿉친구의 등짝을 때리든 말든, 목우람은 결연한 태도로 웅변하듯 외쳤다.
─만일 레나가 위험한 상황에 처한다면 저도 반드시 구하러 가겠습니다!
비행기 안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레나는 이마를 짚고 폭 한숨을 쉬었다. 사월세음은 뭔가를 말하고 싶은 듯 뻐끔대다 착하게 입을 다물었다. 처웃으려는 황지호의 입을 한이가 틀어막았다. 아직 사정을 잘 모르는 독고미로만 미묘해진 분위기에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1학년 0반 아이들은 지난 두어 달 동안 목우람의 다양한 호구 짓을 실컷 보고 듣고 겪은 바 있었기에 그 순간 일명 뇌트워크를 공유하고 말았던 것이다. 아이들의 머릿속에 공통으로 떠오른 것은 대략 이런 전화 통화 내용이었다. ‘꺅! 우람아, 살려줘!’ ‘설마…… 레나?! 무슨 일이십니까!’ ‘후후. 이 여자를 살리고 싶거든 당장 현금을 마련해서 내가 지정하는 장소로 혼자 나와라!’ ‘얼마면 됩니까! 부르시는 대로 준비할 테니 제발 레나의 목숨만은!’ 그리고 (당연하지만) 가짜 비명을 이용한 사기행각에 순진하게 속아 넘어간 호구는 그나마 운이 좋을 경우 돈만 털리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차마 지면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온갖 고초를 추가로 겪게 되는데……. 사태를 수습한 것은 언제나 믿음직한 능력자 반장 김유리였다.
─음, 우람아. 그런 얘기는 어디서 하고 다니지 않는 게 좋겠어.
─예? 어째서입니까?
예비 사기꾼들이 들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하니까, 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대신 김유리는 재치 있게 순발력을 발휘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하잖아? 안 좋은 말은 처음부터 하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정말 그렇군요. 반장의 말이 맞습니다!
고개를 연신 끄덕이는 목우람의 시야를 피해 김유리가 레나에게 눈을 찡긋했다. 레나는 몰래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유리, 나이스! 멋져! 짝짝짝! 브라보!
*
돌계단 중간에서 걸음을 멈춘 레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방금 떠올린 해프닝이 언제 적 일이었는지 헤아려 보았다. 그러니까, 아마 고등학교 1학년 가을……, 맞다. 부반장 생일을 축하하러 영국에 가자고 다 같이 지호네 비행기를 탔던 때였지. 해외여행은 처음이라 두근두근 설렜던 기억이 났다. 정작 영국 땅은 밟지 않고 비행기 안에서만 지내다 왔으니 해외여행이라기에는 다소 어폐가 있었지만, 그래도 반 아이들과 함께 하는 여행은 무척 즐거웠다. 왕복 이십여 시간에 달하는 비행시간을 때우기 위해 아이들은 전용기 내부를 탐험하고 (신기해하는 아이들을 보며 주인 격인 황지호가 연신 ‘하하하!’ 하고 신나게 웃었다) 수다를 떨고 게임을 하고, 그러다가 회의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프로젝터로 다 같이 만화영화를 봤다. 나쁜 마녀에게 속아 영원한 잠에 빠진 공주님을 왕자님이 사랑의 힘으로 구해내는 옛날이야기. 만화영화 속 공주님이 잠든 다락방은 성 맨 꼭대기였고 그곳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수수께끼처럼 기나긴 나선형 계단을 올라야 했다. 마치 지금 레나가 오르고 있는 계단처럼.
벌써 한 시간도 넘게 올라온 것 같은데, 꼭대기까지는 얼마나 남은 걸까? 높이를 가늠하기 위해 레나는 주위를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난간에 두 팔을 얹고 건물 내부를 멀리 내리훑으니 아득히 긴 원통형의 탑이 눈 속에 깊숙이 다가와 꽂혔다. 레나가 홀로 오르고 있는 이 탑은 대롱처럼 안이 텅 비어있는 형태로, 안쪽 면을 따라 나선형으로 지어진 계단만이 유일한 구조물이었다. 벽에는 군데군데 길쭉한 창문이 나 있었으나, 나뭇가지며 덩굴 따위가 빽빽이 드리운 탓에 햇빛은 잘 들지 않았다. 대신 규칙적으로 달린 등불들이 내부를 아늑하게 비추고 있었다. 벽과 바닥을 이루는 돌들은 매끈하고 선명한 빛을 띠었는데, 높이에 따라 그 색조가 무지개처럼 변해 환상적인 느낌을 자아냈다. 계단을 둘러싼 난간은 아름다운 곡선으로 물결쳤고, 섬세하고 우아한 그림이며 조각들이 지루할 틈 없이 빼곡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만일 레나가 이 탑에 들어온 목적이 관광이었다면 느긋이 구경하며 눈 호강을 즐길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아쉽게도 그녀의 목적은 따로 있었다.
삑, 에너미 탐지 스킬이 새로운 에너미의 출현을 예고했다. 레나는 끙 소리를 내며 난간에서 몸을 떼고 채찍을 다잡았다. 동시에 생각했다. 지금까지 열 번도 넘게 전투를 거친 것 같은데 얼마나 더 해야 되는 걸까? 이 지긋지긋한 계단을 얼마나 더 올라가야 보스 룸에 도착할 수 있냔 말이다. 아니, 애초에 내가 왜 이런 수고를 하고 있어야 해? 이게 다 그 호구 때문이다. 정말이지, 함께 만화영화를 보던 고등학생 때만 해도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목우람의 머릿속에 핀 꽃들이 무려 스무 살이 한참 넘도록 싱싱함을 자랑하고 있을 줄은 말이다!
레나는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에너미를 향해 채찍을 휘둘렀다. 짜악, 파열음을 반주 삼아 울분에 이글거리는 외침이 터진다. 악상─ furioso.
“대체 왜 내가 왕자 역을 해야 되냐고!”
*
배경 소개가 늦었지만 레나가 현재 있는 나라는 한국이 아니다. 고작 이십 대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금세기의 비르투오소로 인정 받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권레나는 독주회를 위해 영원의 호수 팀 서포트를 받아 해외에 나온 참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영국이다. 그녀의 친가 쪽 핏줄이 유래한 곳이자 그녀가 기억하는 첫 해외여행 장소. 레퍼토리 연습이며 앙코르 준비, 의상 점검, 리허설, 본 연주회, 사인회, 급기야는 인터뷰다 뭐다 해서 레나는 영국에 있는 내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한국에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귀국을 고작 이틀 정도 앞두었을 때였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방에서 쉬고 있던 레나는 디바이스 화면을 보고 발신자를 확인했다. 고등학교 같은 반 동창인 젊은 마스터 크래프트맨.
─여보세요, 우람아?
─안녕하십니까, 레나! 잘 지내셨습니까?
─응. 좀 바쁘긴 했지만 이제 다 끝났으니까.
─연주회 기사를 보았습니다. 무척 성공적이었다고요! 축하드립니다. 인터넷 커뮤니티 반응도 무척 호평입니다.
─그걸 다 봤어?
─당연합니다. 레나의 연주가 호평을 받는 것이 저의 가장 큰 기쁨이니까요! 아, 물론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저에게는 언제나 레나가 최고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다른 분들도 레나의 연주에서 저와 같은 감동을 느꼈다고 생각하면 제 기쁨도 배가 되는 것 같습니다. 아, 재러드 씨가 이번에도 연주회 영상을 보내 주셔서 감사히 보았습니다만…….
이어지는 칭찬에는 이제 이력이 났다. 민망함에 볼을 긁적이며 감사의 말을 적당히 주워 넘기던 중, 레나는 문득 시차에 생각이 미쳤다. 지금 영국은 오후 8시 13분. 분명, 한국이 영국보다 8시간 빨랐던 것 같은데…….
─우람아, 지금 거기 새벽 아니야?
─네, 이제 4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새벽 4시?! 그 시간에 안 자고 뭐 하는 거야?!
─레나를 만나러 에어 택시를 타고 공항에 가는 중입니다.
대답하기 전, 레나는 방금 들은 것과 기존에 알고 있던 것을 잠시 재확인해 보았다. 레나는 지금 영국에 있다. 이틀만 있으면 모든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반면에 목우람은 한국이고, 한국은 새벽 4시이다. 그런데 목우람은 바로 지금 레나를 만나러 한국에서 영국으로 달려오고 있다고 한다. 어차피 곧 한국에서 만날 수 있는데, 대체 왜? 머릿속을 아무리 열심히 뒤져 보아도 레나는 목우람과 이 만남에 대해 사전에 합의한 기억을 찾을 수 없었다. 금시초문이라는 뜻이었다.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이어진 설명을 듣던 레나는 그만 뒷목을 잡고 말았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였다. 목우람은 최근 (하기야 언제나 그랬지만) 신작을 만들고 있었다. 목우람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역시 언제나 그랬지만) 제법 심혈을 기울인 회심의 역작이라고 했다. 원래라면 레나가 영국에서의 볼일을 마치고 돌아올 즈음 완성될 예정이었으나, 레나의 연주회가 너무나도 성공적이었던 것이 그만 목우람의 영감에 원동력을 과다하게 불어넣어 버린 모양이었다. 불타오르는 열정은 그만 작업을 터무니없는 속도로 폭주시키고 말았고 (그 과정에서 목우람이 몇 번의 끼니와 며칠 밤의 수면을 희생했는지 레나는 그다지 알고 싶지 않았다), 완성된 신작을 품에 안은 장인은 자신의 피와 땀으로 빚어진 예술품이 그의 뮤즈의 손에서 어떤 소리를 내는지 지금 당장에라도 확인하고 싶어 벅차오르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목우람이 컴컴한 새벽에 작업실을 박차고 나와 즉시 출발 예정인 영국 행 비행기 티켓을 끊은 이유였다.
0반 졸업한 지가 언젠데, 이젠 슬슬 좀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 살면 안 되겠니!
레나가 속으로 절규를 하든 말든 목우람은 여전히 기쁘고 쾌활했다. 그의 머리를 가득 채운 꽃의 정원은 영원히 시들지 않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목우람은 장인의 신의 가호를 받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꽃의 신의 가호를 받은 게 아닐까?
─아마 영국 시각으로 오전 중에는 도착할 것 같습니다. 정말이지, 일 분 일 초라도 빨리 레나와 만나고 싶습니다.
─우람아, 잠깐만 기다리라니까……!
─아, 이제 공항에 다 온 것 같습니다. 택시에서 내려야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레나!
퍽 로맨틱한 대사를 전혀 로맨틱하지 않은 뜻으로 투척한 목우람은 어지간히도 흥분한 상태인지 평소답지 않게 자기 멋대로 통화를 종료해 버렸다. 틀렸다, 이제 말릴 수 없다. 레나는 소파에 몸을 파묻고 한숨을 쉬었다. 그야 목우람과 만나는 것이 딱히 싫지는 않았고, 신작이라는 물건은 과연 어떨지 궁금하기도 했다. 어차피 한국에 돌아가면 늦든 빠르든 목우람에게서 바이올린을 받아 시연하게 될 터였으니 그 일이 조금 앞당겨진다고 해서 레나에게 그리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문제가 되는 쪽은 목우람이었다. 레나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축적된 빅데이터에 근거하여 그가 혼자서 한국에서 영국까지 오는 동안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다양한 호구 짓을 상상해 보았다. 장거리 여행에 필수품이라는 수상한 부적 강매당하기, 택시 요금 바가지 쓰기, 괴이쩍은 냄새가 풀풀 풍기는 지역 특산품 대량 구매하기, 어딜 보아도 인기 있을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 못생긴 기념품 무더기로 사기, 이런 것들은 그나마 약한 축에 들었다. 급기야 레나의 상상 속 목우람은 싸고 좋은 숙소를 소개해 주겠다는 말에 깜박 속아 어두운 뒷골목으로 끌려가서 뒤통수를 얻어맞고 그대로 뻗어 버렸다. 여권과 전 재산을 털리고 가진 건 튼튼한 몸 밖에 없는 목우람은 마침내 어느 이름도 없는 외딴 섬 따위에 갇혀 노동력마저 갈취당하다가 그대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운명에 처하고 마는데…….
아냐, 아냐, 아냐! 레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우람이도 다 컸잖아, 그렇지? 설마 어릴 때처럼 바보 같은 사기에 또 당하겠어? 당하더라도 사소한 바가지 정도겠지. 테이블에 놓인 유리잔을 들어 얼음이 든 블루베리 주스를 쭉 들이켜자 좀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우람이가 별일 없이 무사히 도착하게 해 주세요,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레나는 귀자모신님께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마는 법이다. 다음날 늦은 오전, 레나는 목우람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세계 제일의 호구가 어디에서 무슨 일을 당할지 걱정된 레나가 마중 나갈 채비를 막 마친 참이었다.
─여보세요, 우람아?
─안녕하십니까, 레나!
─우람아, 영국 도착한 거야? 지금 어디야? 공항이야? 내가 그쪽으로 데리러 갈 테니까, 움직이지 말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
─아닙니다, 레나. 실은 이미 공항에서 출발해 레나에게 가는 중입니다. 어떤 친절한 분께 도움을 받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친절한 분이라고? 그게 누군데!
레나의 빅데이터에 의하면 목우람이 누군가를 ‘어떤 친절한 분’이라고 칭할 때 이는 높은 확률로 사기꾼을 의미한다.
─히스로 공항에서 레나가 있는 호텔로 가려고 길을 찾고 있었는데, 우연히 이분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레나의 굉장한 팬이신데, 이번 연주회도 직접 관람하셨다면서 아주 생생하고 열렬한 감상을 들려주셨습니다. 정말 심도 있고 유익한 대화였습니다!
목우람의 말투가 너무나 해맑고 순수했기에 그의 호구력에 대해 잘 아는 레나마저도 그만 깜박 안심할 뻔했다.
─제가 레나를 만나러 가는 중이라고 하자, 감사하게도 데려다주신다며 차를 태워 주셨습니다. 마실 것도 주시고요. 아, 그런데 어쩐지 그걸 마신 후로 이상하게 자꾸만 잠이 오는 것 같습니다. 하아암. 이런, 무례한 행동을……. 죄송합니…….
목우람의 목소리는 맥없이 늘어지더니 끝을 맺지 못한 채 끊겨 버리고 이어서 털썩, 몸이 쓰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레나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우람아? 우람아! 일어나! 목우람! 우람아!
곱게 잠든 목우람 대신 레나의 필사적인 부름에 답한 것은 기계로 변조된 듯한 낯선 음성이었다.
─백금의 바이올리니스트 권레나. 당신의 멍청한 장인을 무사히 되찾고 싶다면, 내가 지금부터 말하는 장소로 당신 혼자서 나와라. 지시에 따르지 않는다면 그의 목숨은 보장하지 못할 것이다!
*
‘멍청한 장인’에 대한 분노를 꾹꾹 눌러 가라앉힌 레나는 뻔하고 진부한 협박 멘트에 일단은 따르기로 했다. 비단 ‘멍청한 장인’의 목숨이 걱정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의 전투 실력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자신은 ‘멍청’하지도 않으니까 웬만한 일에는 대처할 수 있으리라. 레나는 만일을 대비해 재러드에게 소식이 없으면 도우러 와 달라는 예약 메시지를 발송한 후, 납치범의 요구대로 혼자서 호텔을 빠져나와 납치범이 지정한 교외의 숲으로 향했다. 새들이 온갖 소리로 지저귀는 숲은 한적하고 아름다워 느긋이 산책하기 좋은 곳이었으나, 아쉽게도 지금의 레나에게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나무와 풀을 헤쳐 가며 지정된 좌표로 향하자 작은 오두막이 나타났다. 안에서 불의의 공격이라도 날아들까 잔뜩 경계하며 조심조심 문을 열었으나 그런 것은 일절 없었다. 대신 레나를 맞이한 것은, 숲속 오두막에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법한 기계였다. 레나는 비슷한 종류의 기계를 학창 시절에 종종 다뤄 본 경험이 있었는데도 자신이 본 것이 맞는지 눈을 몇 번 비비고 다시 확인했다. 애석하게도 그녀의 앞에 놓인 것은 처음 보았던 그대로였다.
이계 공략 시뮬레이터.
─이게 왜 여기에 있어……?
혹시, 이걸 작동시키라는 건가?
그러고 보니 이 집은 겉으로 보기에는 나무로 되어 있었으나 안쪽은 모두 이계 금속으로 덮여 있었다. 아무래도 이 오두막, 아니, 정체불명의 건물은 정말로 시뮬레이터 가동을 위해 지어진 모양이었다. 혹시 누군가 나타날까 싶어 잠시 기다려 보았지만, 더 이상의 방문객은 없는 듯했다. 할 수 없이 레나는 시뮬레이터를 작동시켰다.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긴 했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우웅 하는 소리를 내며 기계는 이계를 구현해 냈고 빛이 눈앞을 메웠다가 사라지자 레나는 타워형 이계의 출발 지점에 서 있었다. 어쩐지 납치범의 시나리오에 말려들어 가는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을 느껴 가며 쓸데없이 아름다운 탑을 오르기를 이제 한 시간여.
촤락, 레나는 내지른 채찍을 회수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설정된 체력 이상의 타격을 입은 까마귀 모양의 에너미가 컨셉에 충실하게 까악 소리를 질렀다. 빈 원통형의 탑 안에 까악─ 까악─ 소리가 겹겹이 메아리치며 울리고, 검은 새는 작은 빛 조각으로 부서져 알록달록한 돌벽을 배경으로 산산이 흩어졌다. 이 이계에서 비슷한 광경을 이미 몇 번이나 경험했지만 레나는 그때마다 꼭 중세풍 판타지 영화를 체험하고 있는 듯한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하필 나타나는 에너미들도 하나같이 꼭 그런 풍이었다. 늑대, 박쥐, 난쟁이, 요정, 움직이는 갑옷, 검은 고양이, 커다란 생쥐……. 문득 벽에 난 창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창을 가리듯이 자란 오래된 식물의 줄기들이었다. 깊은 숲속, 나무와 덩굴에 둘러싸인 높은 탑. 꼭대기에 오르면 잠든 목우람이 가만히 누워 있기라도 한 걸까? 그야말로 잠자는 숲속의 공주님이 따로 없었다. 잠깐, 설마 키스를 해야 깨어난다는 설정은 아니겠지?
시답잖은 상상으로 피로감을 떨치려 노력하며 레나는 시뮬레이션을 마저 공략해 갔다. 보스 룸은 예상대로 탑의 맨 꼭대기에 있었다. 레나는 문을 열기 전 아주 약간의 기대를 담아 예측해 보았다. 혹시, 물레가 있는 다락방?
“여기까지 잘 오셨습니다, 백금의 바이올리니스트.”
아쉽게도 레나의 예측은 틀렸다. 보스 룸에는 물레도, 침대도 없었고 곱게 잠든 목우람은 더더욱 없었다.
레나를 맞은 것은 지적인 분위기의 중년인이었다. 그는 방 뒤편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다가 레나가 들어서자 일어서서 가슴에 한 손을 대며 정중히 인사했다. 그는 검은색 턱시도를 아주 단정하게 차려입고 있었는데, 보타이는 칼 같은 각도로 매어져 있었고 하얀 셔츠에는 주름 하나 없었다. 레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지금까지의 컨셉을 바탕으로 예상했을 때 보스 에너미는 사악한 마녀거나 아니면 불을 뿜는 용 따위일 것 같았는데? 물론 에너미 중에는 인간 형태를 취하는 종류도 있었지만, 저 사람은 전투에 적합한 복장도 아니었고 무기를 숨긴 것 같지도 않았으며 딱히 싸움을 하려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레나가 의아해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중년인이 가볍게 손을 저으며 설명했다.
“채찍은 거두셔도 됩니다. 저는 당신과 싸울 생각이 없으니까요.”
“당신은 누구죠? 우람이를 납치한 게 당신인가요? 우람이는 어디에 있나요?”
“그 장인 청년은 이 탑의 지하에 있습니다. 가둬 놓았을 뿐, 위해는 가하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지금쯤 잘 자고 있을 겁니다.”
지하가 있었다고?!
겨우겨우 눌러 놓은 빡침이 확 끓어오르는 바람에 레나는 하마터면 이성을 잃을 뻔했다. 아니, 내가 여기 꼭대기까지 얼마나 고생 고생해서 올라왔는데 이제 와서 지하라니! 지금 나랑 장난해? 그런 게 있었으면 출발 지점에 안내 표지판이라도 떡 붙여 놨어야 할 거 아니냐고! 이게 뭐야!
불편해진 심기가 레나의 표정에 드러났는지, 중년인이 얼른 덧붙였다.
“어차피 출입은 불가능한 곳입니다. 지하 감옥은 믿음직한 파수꾼이 지키고 있거든요. 파이어 드래곤인데, 당신이 거쳐 온 정상적인 공략 코스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레벨로 설정되어 있지요. 브레스 스킬도 있답니다.”
아, 그러니까 불을 뿜는 용은 그쪽에 있었군요?
빈정거리고 싶은 마음을 힘들게 꾹 참고 레나는 필요한 것을 물었다.
“저에게 원하는 게 뭐죠?”
“바이올린은 가지고 오셨겠지요?”
물론이었다. 이능 바이올린은 레나가 연주하는 악기일 뿐 아니라 그녀의 주요 무기이기도 했다. 수상한 악당과 대적하러 가는데 무기를 떼어놓고 올 리가 없지 않은가? 레나는 ‘멍청’하지 않으니 말이다. 속 편히 잠든 공주님에 대해 생각하니 또다시 머리에 스팀이 오르기 시작해, 레나는 빠르게 사고를 끊고 초대자에게 되물었다.
“그게 어쨌다는 건가요?”
“이곳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중년인, 아니, 납치범은 두 팔을 양옆으로 가볍게 펼쳐 보였다. 레나는 보스 룸을 다시 한번 살폈다. 방은 일견 이 탑의 전체적인 모습과 매우 닮아 있었다. 벽과 바닥을 가득 메운 색색깔의 화려한 돌, 벽에 달린 작은 등불들과 조각들이 그러했다. 한편 다른 점도 있었는데, 바로 천장이었다. 이 방의 천장에는 매우 현대적인 무대용 조명 시설이 달려 있었다. 레나가 위를 올려다보며 눈을 깜박이자 스포트라이트가 동그랗게 떨어져 내려 그녀를 비추었다. 그리고 그 왼편에는 까맣고 커다랗고 꽤나 육중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물체가 하나 있었다. 그랜드 피아노였다.
레나는 깨달았다.
“연주회장인가요?”
“그렇습니다. 당신의 장인을 되찾기 위한 이 이계의 클리어 미션으로 제가 무엇을 요구할지, 이제는 아셨겠죠.”
레나는 목우람과의 전화 통화 내용을 떠올렸다. ‘레나의 굉장한 팬이신데, 이번 연주회도 직접 관람하셨다면서 아주 생생하고 열렬한 감상을 들려주셨습니다. 정말 심도 있고 유익한 대화였습니다!’
‘굉장한 팬’은 눈을 반짝거리며 과다하게 연극적인 어조로 외쳤다.
“당신의 연주를 들은 후로 내내 이 순간만을 꿈꾸어 왔답니다. 자아, 연주해 주시지요, 백금의 바이올리니스트! 이 아름다운 환상 속에서, 오직 저 한 명의 청중을 위해! 제가 만족할 때까지, 아니, 영원히라도……!”
“…….”
이것이 만화영화였다면 분명, 침묵 속에 한 줄기 썰렁한 바람이 흐르는 장면 연출이 있었을 것이다. 레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목우람 구출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이대로 시뮬레이션을 종료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보아하니 한국인도 아니신 것 같은데, 설마 은광고 나오셨나요? 혹시 0반이셨다거나?
본디 사람이란 너무 어이가 없으면 화도 나지 않는 법이다. 정상적인 대화가 성립되리라는 기대를 날려 버린 레나는 대충 아무 말이나 지껄이기 시작했다.
“아니, 저기, 그러니까, 그……. 맞다, 독대를 원하신 거라면, 그냥 평범하게 초청을 하셨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환상 같은 건 제 광림으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는데.”
“노, 노, 노. 그렇지 않습니다. 음악의 궁극적 목표는 바로 음악가와 청중 간의 소통이지요. 음악가가 들려주고 보여주는 것만을 가만히 앉아서 누리기만 한다면 과연 진정한 청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 환상이야말로 제가 당신, 백금의 바이올리니스트에게 보여드리기 위해 정성껏 준비한 저의 마음입니다!”
“정성이고 자시고, 기왕 준비하실 거면 엘리베이터도 같이 준비해 주실 수는 없었나요? 아니면 에너미를 치워 주셨든지요.”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길은 직접 걸어 보아야, 산은 직접 올라 보아야 그 정취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레나 양에게서 받은 감동을 레나 양에게도 온전히 맛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이길 자신이 없다고 누가 그랬던가? 레나는 빙빙 돌기 시작하려는 머리를 짚으며 최후의 항변을 시도했다.
“그렇지만 저,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다리도 아프고 에너미랑 싸우느라 팔도 아프고 진짜 피곤하다고요. 목도 마르고! 아니, 사람을 이만큼 고생시켜 놓고 어떻게 바이올린까지 켜라고 해요!”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시지요. 저는 이 이계의 보스, 휴식 공간 정도는 간단히 내어 드릴 수 있으니!”
딱,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레나의 바로 오른편에 아주 커다랗고 화려한 붉은 색 소파가 나타났다. 사람 한 명쯤은 누워서 쉬기 충분해 보였다. 레나가 놀라움에 입을 벌릴 새도 없이 다시 딱, 소리와 함께 자그마한 탁자가 나타났다. 탁자 위에는 컵과 여러 가지 음료수가 담긴 작은 병들이 놓여 있었다. 세 번째 딱, 소리가 울리자 이번에는 커다랗고 화려한 침대가 나타났다. 헤드에는 복잡한 무늬가 세공되어 있었고, 파스텔 핑크 톤의 침구는 눈으로 보기에도 아주 푹신해 보였다. 레이스 휘장이 사방으로 길게 드리워진 것이 압권이었다.
“아, 아니, 이건 너무 부담스러운데……!”
“무슨 말씀을. 완벽한 연주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 드릴 수 있으니, 요청만 하시면 됩니다. 또 뭐가 필요하시지요?”
“그, 아무튼 일단 여기서 나가면 안 될까요……?”
이 정신 나간 동네에서 슬슬 벗어나고 싶어진 레나가 그렇게 말해 보았으나, 이미 자기만의 세계에 도취한 납치범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런, 그러고 보니 그것을 깜박했군요. 환상의 연주회라면 당연히 그에 어울리는 연주복이 필요한 것을!”
한 번 더 딱, 손가락이 튕기고 레나는 황당함에 입을 벌렸다. 미친, 이 시뮬레이터는 대체 뭔데 이런 기능을 제공하는 거야! 조금 전까지 레나는 전투에도 불편함이 없을 활동적인 옷에 운동화 차림이었으나, 이는 순식간에 백금색의 우아한 드레스와 뾰족한 금색 구두로 바뀌어 있었다. 에너미를 해치우며 탑을 오르느라 흐트러진 머리는 곱게 세팅되어 리본까지 묶였다.
……연주복이라곤 하지만, 화려한 캐노피 침대를 바로 옆에 두고 그럴듯하게 드레스를 차려입고 있자니 이건…… 아무리 봐도…….
“아주 잘 어울리시는군요, 백금의 바이올리니스트!”
레나는 정말로 0반 동문이 아닌지 점점 더 의심스러워지는 납치범이 떠드는 것을 무시하며 휘장을 걷고 침대에 앉았다. 피곤하다는 것은 반쯤은 엄살이었지만 반쯤 사실이기도 했다. 비록 육체적 피로보다 정신적 피로가 더 크기는 했지만 말이다. 지금이라도 무력으로 그를 위협해 클리어로 인정해 달라고 우기거나, 또는 질릴 때까지 바이올린을 켜 주면 의외로 금방 끝날 일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레나는 이제 슬슬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왜 나만 고생해야 해? 애초에 ‘멍청’하게 속아서 일을 만든 게 누군데? 이왕 판도 그럴싸하게 깔린 김에 느긋하게 공주님 된 기분을 만끽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게다가 레나에게는 사실 마음 한쪽에 몰래 믿는 구석이 있기도 했다. 그것은, 그래. 말하자면 일종의 빅데이터라고 할 수 있었다. 학창 시절부터 제법 긴 시간과 수많은 사건을 거쳐 축적된 거대한 정보의 집합은 이제는 꽤 괜찮은 적중률을 자랑했다. 수면에 물그림자가 비치듯, 기억 속에서 문득 하나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떠올랐다. 비록 바보처럼 매사에 진지한 고등학생이 저 혼자 감동에 벅차 외친 말이었지만, 거기에는 분명 맹세와 같은 신실함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반드시 구하러 가겠습니다!’
그래. 레나가 알고 있는 목우람이라면 아마도, 아니, 분명히…….
바로 그때였다. 삐익, 날카로운 경고음이 허공을 갈랐다. 레나와 납치범은 동시에 펄쩍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시뮬레이터의 인공음성이 메시지를 읊었다.
[경고, 히든 플로어가 공략되었습니다.]
히든 플로어?
레나는 재빠르게 생각을 굴렸다. 여기까지 올라오면서 경험한 바로 이 타워형 이계에는 따로 층이 없었다. 히든 플로어라니, 이건 아무래도…….
“말도 안 돼, 지하감옥이 뚫렸다니?! 그 드래곤은 진족이라도 쉽게 처치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니었을 텐데! 게다가 분명 SSR급 수면약 아이템을……!”
당황한 납치범이 뭐라 뭐라 중얼거리는 동안에도 경고음과 메시지는 계속 이어졌다.
[경고, 정상 경로를 이탈한 개체가 관찰됩니다. 경고, 개체의 급격한 비정상적 가속이 관찰됩니다. 경고, 보스 에리어를 향한 이상 에너지 반응이 감지됩니다……!]
쾅, 하는 폭음에 레나는 급히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가 이내 뗐다. 닫혀 있던 보스 룸의 문이 조각조각 부수어졌다. 그 너머로 나타난 것이 누구인지 미처 보기도 전에 거대한 도끼가 날아와 레나와 납치범 가운데에 퍽 소리를 내며 꽂혔다. 혼비백산한 납치범이 체면도 잃고 뒤로 펄쩍 뛰었다. 레나는 양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걷어쥐고 부서진 문 쪽으로 달렸다. 잠들었던 공주님이, 아니 참,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캐스팅이 바뀌었던가? 왕자님이 그곳에 있었다. 여기저기 그을리고 찢긴 탓에 꽤나 볼품없는 꼴이 되긴 했지만 언제나처럼 반짝거리는 눈을 하고서.
“레나! 무사하십니까?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쨌거나 정말로 머나먼 길을 거쳐 다시 만난 목우람은 레나에게 착 달라붙어 괜찮은지, 다친 곳은 없는지 캐물으며 수선을 피워 댔다. 그야말로 어처구니의 마지막 흔적조차 깔끔하게 소멸시켜 버리는 엔딩이었다. 레나는 ‘멍청한 장인’을 다시 만나기만 하면 질릴 만큼 잔소리를 해 주겠다던 다짐도 접고 그만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뭐, 덕분에 인생에서 두 번은 못 해볼 것 같은 공주님 역할을 맡아 본 셈이니까. 이번 일은 너그럽게 용서해 줄까?
*
전의를 상실한 납치범의 처리를 영원의 호수 팀에게 맡긴 후 레나는 목우람과 함께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 둘은 각자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룸서비스를 시켜 늦은 점심을 나눠 먹었다. 화려한 성의 다이닝 룸에서 즐기는 거창한 만찬은 아니었지만, 5성 호텔의 스위트 룸에서 둘이 마주 앉아 먹는 플레이트 요리도 썩 괜찮았다. 디저트로 시킨 푸딩과 초콜릿 케이크까지 싹싹 긁어 해치운 후 목우람은 기다렸다는 듯 부탁을 꺼냈다.
“레나, 이제 켜 주시지 않겠습니까?”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사실 레나의 빅데이터 예측에 따르면 벌써 한참 전에 나왔어도 그리 놀랍지 않았을 소리였다. 레나는 샐쭉해져 목우람을 흘겨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목우람은 품을 뒤지더니 한 장의 아이템 카드를 꺼내 공손히 두 손으로 내밀었다. 그는 언제나 예의범절에 투철하지만 이럴 때의 태도는 숫제 경건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이다.
“말씀드렸던 신작입니다. 줄곧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카드는 레나의 손에서 실체화되어 한 대의 바이올린으로 변했다. 레나는 바이올린을 들어 모양새를 살폈다. 하얗게 빛나는 백금색의 바이올린은, 지금까지 이 장인의 손에서 탄생한 모든 악기들이 그랬듯이, 형태도 색깔도 광택도 모두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는 소리는 더더욱 그러하겠지.
레나는 악기를 들어 어깨에 얹었다. 조율하고 이리저리 활을 그어 가며 음량과 울림과 음색을 확인하는 것, 겨우 그런 별 것 아닌 작업에도 목우람은 두 손을 모아 쥐고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약간 덜 마른 머리카락이 평소보다 더 곱슬거리며 전등 빛 아래에서 물기를 머금고 반짝거린다. 레나는 괜히 시선을 돌리며 한번 헛기침을 하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질문을 던졌다.
“신청 곡이라도 있어?”
“뭐든지 좋습니다. 레나가 켜는 거라면요.”
그 순간 레나의 머리에 떠오른 곡은, 그래. 제법 유명한 곡이다. 누군가에게는 어린이 만화영화의 테마곡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유명한 클래식 작곡가의 왈츠일 곡. 어린 시절 어느 즐거운 날에 같은 반 아이들과 구름 위를 날면서 함께 듣고 또 불렀던 노래.
레나는 활을 들어 올려 현에 가져다 댄다. 숨을 한 번 들이쉬고, 왼손으로 현을 짚으며 오른손으로는 가볍게 무게를 실어 활을 내리긋는다. 현의 진동을 받아들여 바이올린은 공명한다. 그녀의 장인이 몇 날 내내 눈을 붉혀 가며 깎고 붙이고 칠했을 나무는, 첫 연주임에도 그녀의 신체에 녹아든 것처럼 편안히 안착해 노래 부른다. 지금까지 그가 레나를 위해 만들어 낸 모든 악기들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But if I know you,
하지만 만일 내가 당신을 안다면
I know what you’ll do
난 당신이 무엇을 할지도 알아요
You’ll love me at once
당신은 한눈에 나를 사랑하게 되겠죠
The way you did once upon a dream
언젠가 꿈에서 그랬던 것처럼
멍멍
Once Upon A Dre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