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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레나는 사방이 시리도록 하얀 공간 속에 서 있다. 기묘하리만치 텅 비기만 한 이 장소에 이상을 느낄 법도 하건만 그녀는 익숙한 듯 공간을 거닐었다. 이미 수십 번을 반복했던 발걸음이기에 소녀의 전진에는 거침이 없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곳에서 소녀가 한참을 걸어가자 모습을 드러내는 금잔화 가득한 정원. 이레나가 꽃무더기 속의 한 인영을 바라보았다. 이 역시 왜인지 그녀에겐 익숙한 장면이다.

 

 옅은 갈색빛의 머리칼이 산들바람에 나부끼며 소년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이 곱게 휘며 입에서 흘러나온 미성의 목소리가 소녀의 이름을 부를 때―.

 

 귓가에 울리는 짧은 종소리에 이레나가 희미하게 눈을 뜬다. 차츰 선명해져 가는 시야로 아직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새벽빛이 비춰들었다. 어째 정신이 몽롱하다 했더니 예기치 않은 소음 탓에 평소보다 이르게 눈을 뜬 듯싶었다. 이레나가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또 그 꿈이다. 몇 달 전부터 간간히 머릿속을 헤집는 이 꿈은 일주일에 한번 꼴로 꾸게 되는가 하더니 그 주기가 점점 짧아져 이젠 하루도 거르지 않고 꾸게 되었다. 그 덕에 이레나의 눈 밑에는 어느새 거뭇거뭇한 다크써클이 자리 잡은지 오래였다. 상체를 반쯤 일으켜 세우고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이레나가 또 다시 울려오는 종소리에 슬슬 남은 잠을 몰아냈다. 이 새벽에 대체 누가 온거지, 의문을 품으면서도 그녀는 조심스레 현관의 문을 연다.

 

 턱, 문이 열리다 말고 멈췄다. 무언가에 걸린, 아니 문 뒤에 무언가 커다란 것이 버티고 서 있는 듯 했다. 좁은 문 틈새 사이로 겨우겨우 몸을 빼낸 이레나가 비로소 그 정체를 확인 했으나, 눈으로 본다고 무엇인지 가늠 할 수 있을만한 게 아니었다. 그녀 자신보다도 두뼘 정도 길이가 큰 거대한 박스엔 잘못 배송 온 것이 아니라는걸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큰 글씨로 이레나 세 글자가 적혀 있다. 대체 누가 이런 물건을 보낸ㅡ아니, 애초에 물건이 맞긴 한건지. 거대 식물 같은 건가?

 

 옅게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이레나는 한참이나 끙끙거리며 기어코 그 상자를 좁은 자취방 안으로 들여놓았다. 기다란 상자를 바닥에 뉘여 놓고, 책상 한켠에 굴러다니던 커터칼을 쥐어 죽 선을 그었다. 양쪽으로 열린 택배 상자 안으로 보이는 또 다른 기다란 노란색 박스와 그 위에 놓인 작은 카드 한 장. 이레나는 카드를 먼저 집어 든다. 예쁜 문양이 새겨진 앞장과 그 뒷장에 적힌 짤막한 한마디―. 나의 뮤즈에게. 뮤즈? 이게 무슨 소린지. 이레나는 대수롭지 않게 카드를 치워둔 채로 노란 상자의 뚜껑을 열었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녀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 그곳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게 뭐야. 뚜껑을 든 채 이레나가 몇 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혹시 제가 잘못 본건가 싶어 어둑어둑한 방을 전등으로 밝히고 다시 '그것'을 바라보았으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적당히 곱슬거리는 옅은 갈색의 머리, 유순한 눈매와 부드럽게 닫힌 입꼬리. 상자에 꼭 들어찰 만큼 크고 기다란 팔과 다리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그러니까, 어느 모로 보아도 영 사람같이 생긴 무언가가, 제게 배송되어왔다는 뜻이다.

 

 사람같이 생긴 무언가. 아니, 사람. 아니지, 사람일 리가 없잖아. 인형? 인형인가? 요즘 인형 만드는 기술이 이렇게 발달된지는 몰랐네. 꼭 사람같잖아! 봐, 진짜 사람과 똑같이 생기긴 했지만 만져보면 촉감이…, 으아악!! 이레나가 기어코 새된 비명을 지르고야 말았다. 이건 인형이잖아. 인형이어야 하는데. 그런데 느낌이, 이건, 이건….

 

 꼭 사람의 피부를 쓰다듬는 듯한 촉감이다. 게다가, 한없이 차가운. 이레나는 순간 누군가가 사람을 죽이고선 시체를 제 집으로 보낸게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했다. 그것은 인형이라기엔 지나치게 실제적이었으며, 진짜 사람이라기엔 지나치게 차갑고 이질적이었다. 저것이 기묘할 정도로 정교하게 제작된 인형이든, 온기를 잃은 인간의 몸뚱이든 둘 다 이레나의 상식으로는 쉬이 납득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수상한 배달품을 쓰레기장에 처넣어야 할지, 경찰에 신고해야 할지, 아니면 숨겨야 할지 고민하며 웅크린 순간에 그것이 눈을 떴다. 이레나는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웅― 하는 작동음을 내었다. 주저앉아 있던 이레나는 이젠 아예 고개를 떨군 채 무릎을 끓어안고는 벽에 기대 있었다. 저걸 계속 보고 있으려니 머리만 더 아파지는 것 같아서. ……저기, 여긴 어딘가요? 레나? 레나인가요? 얼굴이 잘 안 보이는데요.

 

 뭐?

 

 미성의 목소리에, 그제서야 이레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마주했다. 짙은 갈색의 맑은 눈동자를. 조금 긴 탓에 약간 흘러내리는 머리,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팔, 그의 순진무구한 표정을. 두 쌍의 눈이 마주친다. 소녀의 얼굴이 일그러짐과 동시에 그것이 미소짓는다.

 

*

 

 ―레나, 저 가게에서 토마토가 한 박스에 오천원 입니다! 이건 사야 해요!

 ―안돼, 우람아! 다 오래돼서 물러 터진 것들뿐이잖아. 게다가 사람도 둘 뿐인데 한박스나 사봤자 다 못 먹을걸?

 ―그런가요, 역시 레나는 생활력이 굉장하군요!

 

 대체 어디가 굉장하다는 거니…. 이레나가 튀어나올 뻔한 말을 꾹 눌러 삼켰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천진난만한 얼굴을 하고 재잘재잘 떠드는 목우람에게 눈치를 줄 수도 없어서 이레나는 슬며시 고개를 돌린 채 깊은 한숨을 쉬었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이레나는 2주 전의 일을 회상했다. 그녀의 집에 수상한 상자가 배달되었던 날을. 사람인지 뭔지 분간조차 할 수 없었던 그것이 목소리를 내고 이레나와 눈을 마주친 순간에, 소녀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든 그 순간에, 그것은 환하게 웃으며 명랑하게 말했다. 역시 당신이군요, 레나!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당신의 수호요정, 목우람 입니다!

 

 ―……보통은 수호천사 아닌가?

 

 천사니 요정이니 뭐라고 부르던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하면서도, 반쯤 정신이 나갔었던 이레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무말이나 내뱉을 수 밖에 없었더랬다.

 

 ―천사도 좋죠! 그렇지만 레나가 저더러 우람이는 꼭 요정 같다고 해주셨었으니까요.

 ―내가?

 ―네!

 ―…내가?

 ―네! 아, 엄밀히 따지면 당신이 한 말은 아니에요. 제가 아주 처음에 속해 있었던, 차원 3462번의 레나가 해준 말이었지요!

 

 더더욱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당신께서 붙여 준 별명이니 저는 요정이 좋습니다! 물론, 중요한건 호칭 따위가 아니라 제가 당신을 돕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사실이에요!

 ―너 혹시 외계인?

 ―외계인이라뇨?

 ―아니면 뭐야? 정신이상자? 아니 혹시…, 스토커야? 바보인척 해서 접근하려는거지!? 겨, 경찰에 신고할거야!

 ―전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레나!

 ―첫 등장부터 수상함 덕지덕지 묻혀온 애가 뭐라는거야, 자꾸 이상한 소리 하지마!

 

 이레나가 제 옆에 놓여있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목우람'으로부터 빠르게 거리를 벌린 것은 덤. 그래봤자 집 안이라 멀리는 못 갔지만. 이 와중에도 목우람이라는 그것의 표정은 정말로 억울하고 간절해 보여서, 정말로 신고했다가는 곧 울기라도 할것같은 얼굴이라 차마 응급번호를 누르진 못했다.

 

 그 후로도 한참을 더 투닥거리고 나서야 상황은 진정되었다. 제발 절 버리지 말아 달라며 소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울먹거리던 목우람과, 비현실적인 상황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갈팡질팡하던 이레나. 자신은 레나에게 일말의 위해도 가할 생각이나 능력이 없으며 자신을 맘껏 부려먹어도 좋으니 부디 옆에 머물게만 해달라는 목우람의 말에, 이레나는 결국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야 말았다. 분명 숨을 안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움직이고. 정신이 이상한 줄 알았더니 또 말은 또박또박 잘하고, 경찰에게 격한 거부반응을 보이며 노동을 자처하면서까지 제 곁에 있으려 든다. 얘, 역시… 외계인인가 봐. 같이 있게 해 달라는 건 인간의 행동 양식을 연구하려는 걸까? 순둥한 얼굴을 하는 것도 인간의 호감을 쉽게 사려 만든 것일지도. 그럼 경찰에 신고하면 생체실험 같은 걸 당하게 되나?. ……그래도 엄청 나쁜 애는 아닌 것 같은데. 수상하긴 하지만 예의도 바르고. 정말로 내게 피해를 줄 것 같진 않아. 그럼 잠깐은 같이 있어 봐도 괜찮지 않을까? 아아, 모르겠어…….

 

 그렇게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와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더랬다. 이레나가 반대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걷고 있는 목우람을 보았다. 여전히 기분 좋게 싱글벙글 웃고 있는 이 소년과의 동거는, 솔직히, 나쁘진 않았다. 왜인지 그가 온 뒤로는 그 이상한 꿈도 꾸지 않았고. 마음껏 부려먹어 달라는 게 농담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목우람은 빨래부터 청소, 요리까지 온갖 잡일을 도맡아 했기에 요즘 이레나는 뜻밖의 편안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혼자 일하게 하는 것이 못내 미안해 청소를 거들어주려고 하자 목우람은 레나에게 이런 험한 일을 시킬 순 없어요, 제게 맡겨두시라니까요! 하고 말할 뿐이었다. 그래, 괜찮았지. 한가지만 빼면.

 

 사건은 한바탕 소동이 있었던 그 날의 다음 날에, 목우람은 레나를 지저분한 집에서 살게는 할 수 없다며 혼자서 대청소를 자처하고 나섰던 이레나는 조금 부끄러워졌다ㅡ날에 일어났다. 이레나의 만류를 뿌리치고 꿋꿋이 찬장의 먼지를 털던 목우람은 부엌과 거실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난 뒤에 들어간 베란다에서 그것을 기어코 발견하고야 만 것이다. 지금의 이레나에겐 다소 작아보이는, 먼지가 우수수 쌓인 케이스 안의 학생용 바이올린을. 그때 목우람의 눈은 그가 이레나를 처음 봤을 때 만큼이나 반짝였더랬다. 그의 눈이 빛나는 만큼 그걸 본 이레나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지만, 기쁨에 겨운 목우람은 그걸 눈치 챌 겨를도 없었다.

 

 ―레나, 레나!

 ―으,응? 왜 그래?

 ―세상에! 이번 차원의 레나는 바이올린을 연주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당신도 바이올린을 켜는군요! 굉장히 기쁩니다!, 저기, 부디 한 곡만 연주를….

 ―싫어.

 ―네…?

 ―바이올린은 어렸을 때 잠깐 배운 게 다고, 그만둔 지 한참이나 됐으니까. 실력도 형편없을 거야.

 ―레나는 분명 잘 할 겁니다!

 ―싫다니까!

 

 무심코 소리를 지른 이레나가 자신의 목소리에 놀라 흠칫 떨었다. 목우람이 세상을 잃은 표정을 지었으나 레나는 애써 소년을 외면했다. 잘됐네, 이따가 쓰레기 버리면서 그것도 같이 버리자. 이제 필요 없으니까. 목우람이 울망울망 한 눈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 보았으나 이레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목우람이 고개를 숙인다. 저, 그럼... 버릴거라면 차라리 제게 주세요. 자그마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이레나는 한참을 침묵하다 종내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쓰지도 않는 물건이니.

 

 그렇게 일단락되는 듯 했으나, 그녀의 생각보다 목우람은 꽤나 끈질겼다. 다음날 이레나의 화가 풀린 듯 하자 또 다시 바이올린을 연주 해 달라 졸랐던 것이다. 전날의 일은 까맣게 잊은 것 마냥 행동하는 소년을 보며 이레나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고, 그게 화근이었다. 목우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집안일을 하다가도, 이레나의 기분이 괜찮아 보일 때면 어김없이 그녀에게 연주를 청했다. 이레나는 매번 단호하게 거절하면서도 결국 그를 끝까지 내치지는 못했다. 목우람이 이레나를 힐끔힐끔 바라보며 입꼬리를 씰룩였다. 또 물어보려나 본데.

 

 ―레나, 오늘은 하늘이 참 맑고 깨끗합니다! 이런 쾌청한 날씨에 아름다운 연주소리를 들으면 정말 기분이 좋을 것 같은데요!

 ―그럴 줄 알았어.

 ―레나도 동감하시는 건가요! 이제 연주를 해주시려고요?

 ―아니. 우람이는 왜 자꾸 바이올린에 집착하는거야? 난 못한다니까.

 ―잘 하실 것 같은데요! 그리고 설령 실력이 아직 부족하다 하더라도 부끄러워하실 것 없습니다. 전 능숙한 연주가 아니라 레나의 연주가 듣고 싶은 거니까요!

 

 가느다란 한숨 섞인 바람이 머리칼을 헤집어 놓았다. 이레나가 반쯤 뜬 눈으로 목우람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우람아, 얘기했잖아. 안하는게 아니라 못하는 거라고. 다시 고개를 돌린다. 여전히 세게 부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려 목우람은 이레나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잠시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밟는 이레나를 소년이 한발짝 뒤에서 천천히 따라나선다. 있잖아, 난 언니가 한명 있는데. 그 작은 바이올린도 언니가 사줬었어. 내가 초등학생이었고 언니가 고등학생이었지. 그땐 공부니 뭐니 하는 것들로 한창 바빴을 텐데도, 늘상 조용하게만 지내던 내가 뭔가를 하고 싶단 적이 처음이었어서, 꼭 비싸고 좋은걸로 구해다 주고 싶었대. 그, 부모님은 내가 바이올린을 배우는 걸 좋아하지 않아 하셨거든, 뭐랄까, 좀 불협화음이 잦은 집안이기도 했고. 언니가 몰래 악보를 구해다 주면 난 혼자 옥상에서 연습하고. 언니를 초대해서 작은 연주회도 열었어. 그래도 그땐 참 재밌었는데.

 

 어느새 멈춘 바람을 따라 이레나도 걸음을 멈춘다. 목우람은 조용히 귀를 귀울였다. 그러다가, 어느날 부모님한테 바이올린을 들켜버렸지. 사실 나한테는 별로 관심이 없으셨어서, 그렇게 까지 화내실 줄은 몰랐는데… 엄청 노발대발 하시더라고. 네 까짓 게 잘난 척하지 말라던가, 네가 그래봤자 성공 할 수 있을거 같냐던가. 매일 폭언을 듣고, 그나마 부모님과 사이 좋던 언니마저 날 감싸주려다가 부모님과 싸워서 집안 분위기는 박살 나고. 그냥 그곳에서 버티기가 힘들어서, 고등학생때부턴 아예 집을 나와버렸어. 기숙사가 있는 학교라서 다행이었지. 그 뒤론 집에는 한번도 안갔어. 그래도 가끔 언니는 만나는데, 매번 엄청 지쳐보이고. 그때부터 바이올린은 안 켰어. 아니, 못 켰어. 있잖아, 내 잘못이 없다는걸 머리로는 아는데…. 결국 우리집은 조각조각 부서졌잖아. 적어도 바이올린을 들키기 전까지는 화목하진 않았어도 이 정도 꼴은 아니었는데. 꼭 내가 도화선에 불을 붙여 폭탄을 터트려버린 것 같아. 내가 한 가지만 포기했으면 우리 가족은 꽤 괜찮았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끝까지 고집부린 바람에 모든 게 무너진 거야. 난 바이올린을 들 자격이 없어. 나 때문에 우리 집은 난장판이 되었는데 나 혼자 행복해지자고 그걸 붙잡고 싶지 않아. 자꾸 그런 생이 들어서 바이올린을 못 들겠더라.

 

 어느새 좁은 길목엔 노을이 서서히 내려 앉는다. 이레나가 뒤를 돌아 한발짝 물러서있던 목우람을 바라본다. 해를 등지고 서는 바람에 이레나의 얼굴엔 그늘이 져, 목우람은 아직도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목우람은 한참을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실, 전 여기가 처음이 아니에요.

 ―…어?

 ―음…. 차원2360번과 차원356번의 레나는 바이올린을 고르지 않았더라고요.

 

 이레나는 아무 말이 없었다. 문맥을 이해하지 못해 생긴 침묵이었으나 목우람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당시의 저에게는 조금 충격적인 일이었는데 말이에요. 사실 조금이 아니고 많이 놀랐었지요. 한 명은 피아노를 쳤었고, 한 명은 과학소설 쓰는 일을 했어요. 그 둘 말고도 그림을 그리는 레나도 있었고, 첼로를 연주하던 레나도 있었죠. 어떤 것을 하고 있든 그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어요. 아마 제 첫 번째 세계의 당신이 진창 속에서 바이올린을 빛으로 삼아 길을 찾아냈듯이, 그 세계들에선 피아노와 소설과 그림과 첼로가 그 빛의 역할을 했던 거겠죠. 바이올린이 당신의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면, 꼭 그게 아니어도 돼요. 제가 계속 연주를 부탁했던건, 대부분의 세계에서 당신의 길을 함께하던 소재가 그것이었기 때문일 뿐이니까요. 물론 레나의 연주를 듣고 싶었던 제 사심도 조금 많이 섞여 있긴 했습니다만!

 

 …그렇지만, 당신이 그것을 원함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는 거라면, 부디 포기하지 말아 주세요. 레나의 잘못이 아니었어요. 물론 겨우 제 말 한마디로 감정의 무게가 덜어지진 않겠지만, 그래도 얘기할래요.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바이올린을 배우는게 마음에 안들었다니, 그냥 레나의 부모님들께서 작은 딸이 무엇을 배우든 한번만 눈감아 주었다면, 폭언을 일삼지 않았다면, 큰딸의 말에 한 번이라도 귀를 기울였다면 그렇게 가정이 파탄나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저 마음에 들지않는 것 하나만 참았으면 화목하진 않아도 그런대로 괜찮은 가족을 보전할 수 있었겠죠. 그렇게 하지 않은건 그들의 선택이에요. 그리고 양육자들에겐 마음에 들던 들지않던 피양육자를 끝까지 책임지고 보호 할 의무가 있잖아요!

 

 목우람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다 결국 마지막엔 소리를 질렀다. 점점 더 어둑해지는 하늘을 따라 길거리의 가로등에 빛이 생기며 두 인영을 바로 비추었다. 밝은 상앗빛이 이레나의 얼굴에 드리우고, 소년과 소녀가 두 눈을 마주보았다. 잠시간의 적막 끝에 이레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고마워, 우람아. 그렇게 말해줘서……. 있잖아, 이따가 집에 가면,

 ―…레나!

 

 찰나에 벌어졌다. 목우람이 레나의 이름을 외침과 동시에 그녀의 팔을 세게 잡아 당겨 멀리 떨어트렸고, 직후에 검은색의 소형차량이 소년의 몸을 강타했으며 그 몸뚱아리는 반동에 의해 2-3미터 쯤 뒤로 날아갔고, 그는 왼쪽 어깨와 팔목, 머리를 가로등의 밑둥에 세게 부딪혔다. 강한 충격에 넘어졌었던 이레나는 일어서자마자 곧바로 소년에게 달려가 강하게 부딪힌 그의 팔목이 크게 찢어진 것을 보았으며 곧바로 겉옷을 벗어 소년의 상체를 꼼꼼히 감쌌다. 소년은 이미 의식을 잃은 지 오래였다. 운전석에서 누군가가 내려 다가온다. 세, 세상에. 구급차, 119를 불러야….

 

 ―아뇨, 괜찮아요!

 

 제가 확인해 봤는데 상처는 없더라고요. 친구는 오늘 술을 많이 먹는 바람에 원래 의식이 없었어서…. 병원은 나중에 갈테니, 집까지만 좀 태워주실래요? 이레나가 빠르게 말했다. 운전자는 찜찜해 하면서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레나는 목우람을 부축해 함께 뒷자리에 타고는 그를 무릎에 눕혔다. 운전자는 갑작스레 생긴 사고에 정신이 없는 듯했다. 운전자가 앞만 보고 있다는 걸 확인한 이레나가 목우람을 감싸던 겉옷을 조금만 들어 올려, 그의 팔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여전히 크게 찢어져 있다. 다만 그녀가 확인하려 했던 것은 상처가 아니라 더 깊숙한 곳의 무언가다. 그곳에 본래 자리 잡고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찢겨나간 살갗 아래로는 붉은 피와 근육, 뼈 대신 각양각색의 아주 얇은 전선들과 금속의 재질로 된 크고 작은 부품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레나는 다시 조심스럽게 겉옷을 여며 주었다. 거리가 멀지 않았기에 차량은 금세 도착지에서 멈춰 섰다. 옮기는 걸 도와주겠다는 운전자를 끝내 뿌리친 채 이레나는 혼자 목우람을 부축해 집안에 들여놓았다. 다시 상처 부위를 들여다보았으나 그녀로서는 이것을 어디서 치료할 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금의 목우람이 완전히 작동을 멈춘 것인지, 아니면 그저 충격으로 잠시 정신을 잃은 것인지……. 그 무엇도 알 수 없었다. 새삼 이레나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녀는 목우람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생각보다 목우람에게 꽤 애정을 붙이고 있었다는 것을.

 

 빈말로도 결코 화목하다곤 할 수 없는 집구석을 뛰쳐나왔던 게 그녀의 고등학교 시절,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어찌저찌 살아남으려 고군분투해야 했던 이레나에게 심적 여유가 모자랐던 건 사실이었으므로…. 친언니인 이여름을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받아보는 낯선 이의 이유 없는 호의와 친절에, 이레나는 한편으론 경계하면서도 그를 천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에 탄 잉크 몇 방울, 봄철에 사방으로 퍼진 개나리 향기, 혹은 맞잡은 두 손의 온기처럼. 목우람의 존재는 빠르게 이레나의 세계로 번져나갔다. 이제 이레나는 목우람이 자신에게 진실만을 고했다는 것을 안다. 목우람은 오로지 이레나 만을 돕기위해 왔다. 전혀 그녀를 해칠 용의가 없으며, 오히려 온 마음을 다해 그녀를 아낀다. 무엇보다 소녀를 향한 경외로 가득찬 소년의 머리는 그녀에게 거짓말 따위를 할 수 조차 없을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레나의 목우람에 대한 믿음이 공고해 짐에 따라 그녀 마음속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불안감 또한 점차 커져만 갔던 것은, 인간관계가 좁디 좁은 그녀조차도 이유없는 애정이란 건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목우람이 무해한 존재로 판명됨과 동시에 이레나는 때때로, 아니 자주 전과는 다른 의문을 품었다. 넌 나한테 왜 이렇게 잘 해주니? 날 왜 그런 눈으로 봐? 널 요정 같다고 했던 이레나는 대체 누군데? 네가 가끔 하는 그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은 대체 뭐야? 물론 입밖으로 내진 않았다. 여전히 종종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목우람의 입에서 대체 어떤 대답이 나올지 이레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에. 목우람은 꼭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굴었고, 정말 아니었다. 짙은 불안감이 안개처럼 피어올라 이레나를 뒤덮는다. 수많은 이레나의 존재를 알고있는 목우람, 차원을 넘나들며 떠도는 목우람. 이레나는 목우람이 자신을 영영 떠날까 문득 두려워 졌다. 그렇게 많은 차원과 이레나들이 있다면 나는 수백 수천 중의 하나일 뿐일테니까. 나를 대신할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목우람이 사라질 것 같아서, 다시는 네 명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아니 그것보다도, 꼭 처음 만났던 날처럼 한없이 차갑기만 한 그의 피부와 미동 없는 신체에, 네가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할 것 같아서……. 기어코 소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우람아, 눈 좀 떠봐….

 

 그리고 목우람이 눈을 번쩍 떴다. 이레나는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웅ㅡ하는 작동음과 함께. 두쌍의 눈이 서로 마주친다. 레나, 지금 우시는 겁니까? 목우람이 조금 당황한 듯한 얼굴로 물었다.

 

 ―뭐,뭐,뭐야!

 ―네? 뭐냐고 물으시면... 저는 목우람인데요.

 ―아니, 그게 아니라, 난 네가, 네가 꼭 죽은 줄 알고...!

 

 전 더할 나위 없이 건강합니다! 아, 좀 수리가 필요하긴 하겠네요. 좋지않은 꼴을 보여 죄송합니다, 레나. 저기, 화나셨나요? 목우람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고, 조금 인상을 찌푸린 채로 고여있던 눈물을 한방울 떨어트린 이레나는 목우람을 와락 끌어안았다. 피하지 않는 목우람을 더 세게 끌어안으며 귀에 대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우람아, 얘기해줘. 네가 어디에서 왔는지, 정체가 뭔지. 목우람이 상체를 일으켰다.

 

 ―음, 조금 재미없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아마 이 세계의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을 이야기 들이라.

 ―상관없어. 난 그냥 네 이야기가 듣고싶을 뿐이야. 네가 궁금해, 우람아.

 

 목우람이 조금 멋쩍은 얼굴을 했다. 음, 그러니까, 어느정도는 예상을 하셨겠지만……. 저는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차원에서 태어났습니다. 거긴 어떤 곳이었냐면요, 소수의 사람들이 초능력과 비슷한 힘을 가질 수 있었고 그들이 이계에서 튀어나오는 괴물로부터 사람들을 지켰습니다. 그곳의 레나와 저도 그런 일을 했었고요. 동시에 레나는 아주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했고, 저는 그런 레나를 위해 바이올린을 만들었었지요. 저는 고등학생 이 되었을 때 까지도 삶의 목적을 찾지 못해 꼭 영혼이 없는 인간이 살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당신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영상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요, 그때 생각했습니다. 당신의 연주에 제가 작은 보탬이라도 될 수 있다면, 당신의 연주를 한 번만 더 들을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요! 운이 좋게도 저희는 같은 학교에 재학 중이었어서 금세 만날 수 있었고, 당신께서도 저를 싫어하지 않으신 덕에 저희는 함께할 수 있었지요. 저희는 종종 싸움터에 나서야 하는 처지였으니까요, 학교를 다니던 중에 예상치 못한 위험이 찾아와 저희 둘다 생사의 고비를 마주한 적이 있었는데……,

 

 ―호, 혹시 내가 일찍 죽은거야?

 ―예? 아뇨! 저희는 둘 다 장수했습니다. 플레이어들은 일반 시민보다 수명도 훨씬 기니까요. 학창시절에 적들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난 뒤에는 나름대로 평화로운 일생을 보냈습니다. 당신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지요. 백금의 바이올리니스트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정말 행복한 나날 들이었는데……. 결국 레나가 먼저 세상을 떠나긴 했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꽃이 만개한 곳에서의 고요한 죽음이었어요. 당신은 마지막의 순간에 미소를 짓고 있었답니다. 무력이 강하다곤 해도 저희 역시 인간이었으니, 언젠간 끝이 있을 거란 걸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좀 힘들긴 하더라고요. 그나마 제가 먼저 떠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어요. 죽음은 상관없지만 만약 당신이 홀로 남았다면 당신 역시도 무척이나 괴로워하셨을 테니까요.

 

 식음을 전폐하고 거의 폐인처럼 살고 있었는데요, 당신의 노랫자락을 무척이나 아꼈던 상위존재ㅡ이곳의 성경이나 설화에 나오는 신과 같은 존재입니다ㅡ몇이 제게 내려왔습니다. 제가 아름다운 선율을 자아내는 악기를 만들어주었던 것에 감사를 느껴, 작은 선물을 주겠다고 하셨지요. 제가 살던 곳에 더 이상 머무르지 못한다는 것을 대가로 저는 레나가 있는 곳을 찾아갈 수 있게 되었어요! 레나, 평행우주라는 것을 들어보았습니까? 이 광활한 우주에는 우리가 사는 곳과 비슷한 또 다른 세계가 몇천, 몇만 개나 있다고 합니다! 각각의 세계에 비슷하고도 다른 이레나와 목우람 들이 있지요. 전 그곳들에서 레나가 만들어내는 선율을 다시 한번 들을 수 있었답니다! 분명 모두 다른 세계들일 텐데도, 어째서인지 당신들은 조금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어서요, 꿈을 잃지 말라는 뜻으로 바이올린을 직접 만들어주기도 했었죠. 저는 당신의 수호요정이니까요! 왜, 신데렐라를 보면 요정 할머니가 신데렐라를 도와주려고 옷과 마차를 만들어 주잖아요. 그것처럼요! 목우람이 환하게 웃었다.

 

 목우람이 상체를 감싸고 있던 겉옷을 벗겨내곤 다쳤던 팔을 들어 보였다. 이건, 뭐랄까…. 제 신체를 이 세계에 머물기 적합하게 만들기 위해 약간의 힘을 쓴 결과에요. 개연성이라고 할까요, 상위존재들이 부여한 힘은 당신과 저를 제외한 다른 이에게 제 존재를 보여도 의심을 사지 않을 만한 구조와 외관을 갖추어 주기도 하거든요. 이 세계의 기술력으로 구현할 수 있는 최선의 신체를 만들어서 그 안에 영혼을 담는 거예요. 세계를 옮길 때마다 살아있는 신체를 만드는 건 품이 많이 드니까요! 예전에 갔었던 세계 중에는 과학기술이 그다지 발전하지 않은 곳 이었어서요, 결국 몸을 갖추지 못하고 강아지의 모습으로 당신을 만난 적도 있었습니다! 하하, 신선한 경험이었어요. 좀 불편하긴 했지만, 당신이 저를 무척이나 귀여워 해주셔서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목우람이 멋쩍게 웃었다. 이야기가 길었네요. 음, 그러니까…,

 

 고마워. 살며시 눈을 접어 웃은 이레나가 조용하게 읊조렸다. 네가 찾아와 줘서, 그 세계의 이레나들은 무척이나 행복했을 거야. 나도 마찬가지고. 네가 와줘서 기뻐.

 

 목우람이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저, 사실 이야기해야 할게 하나 더 남았어요. 이레나가 말해 보라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저 말이에요, 이곳을 곧 떠나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뭐? 가, 갑자기?

 ―저도 조금은 더 머무를 예정이었는데, 부상을 치료하면서 예상치 못하게 에너지를 과다하게 소비한 모양이에요. 이 신체에 부여된 힘이 얼마 남지 않아서, 아마 삼…,

 ―3일?

 ―아뇨, 30분 정도.

 

 뭐라고! 이레나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너무 갑작스럽잖아. 그래, 모든 만남에 끝은 있는 거지만, 2주는 너무 짧잖아, 난 이제 겨우 너를 알았는데…. 목우람 역시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께도 제가 바이올린을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굉장히 아쉽습니다. 있잖아요, 레나. 당신께서 아주 싫지 않다면요, 우린 이제 만날 수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응, 연주해줄게.

 ―네? 정말입니까?! 레나, 정말 감사하지만 레나께서 힘들다면….

 ―아냐, 이번엔 할 수 있을 것 같아. 연주를 손에 놓은 지 꽤 돼서 듣기엔 별로일지도 모르지만.

 

 이레나는 거실 한구석에 소중히 놓여있던 바이올린 케이스를 열었다. 분명 몇 년간 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먼지 하나 쌓이지 않았으며 조율도 되어 있었다. 이레나 몰래 목우람이 조금 손을 댔던 모양이었다.

 

 ―곡은 뭐가 좋아?

 ―무엇이든지요! 당신이 좋아하는 곡이라면 저도 무엇이든 좋습니다!

 

 하하, 가볍게 웃은 이레나가 지판에 손가락을 가볍게 얹고는 턱받침에 얼굴을 대었다. 학생용 바이올린은 이레나의 성장이 중학생때 멈추었기 때문인지 그리 불편하진 않았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나무판의 감촉을 느끼며 이레나가 바이올린을 들었다. 선곡은 쇼팽 에튀드의 Op. 10, 3번 곡, 이별의 노래. 곧이어 잔잔하면서도 아름다운 선율이 방 안 가득히 울려 퍼졌다. 목우람은 눈을 감고 현과 활이 자아낸 서정적인 음색에 귀를 맡겼다. 한참의 연주 후에, 그리움을 담아낸 고요한 노랫소리가 잦아들었고.

 

 ―…어때, 들을 만했어?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최고의 연주였습니다, 레나.

 

 이레나가 싱긋 미소지었다. 다행이다. 서글픈 눈으로 목우람의 팔을 바라보았다. 그가 이세계의 존재가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신체는 서서히 하얀 입자로 변해 천천히 흩어지고 있었다. 바이올린을 내려놓은 소녀가 소년에게 다가가 그를 소중히 끌어 안았다. 너와 함께 했던 14일은 절대로 잊지 못 할거야, 평생. 목우람 역시 이레나를 마주 끌어안았다.

 

 ―있잖아, 모든 세계엔 각각의 이레나와 목우람이 있다고 했잖아.

 ―네, 그렇습니다.

 ―그럼 내가 사는 지구에도 이곳의 목우람이 있겠네.

 ―그럴 겁니다.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요.

 ―몇 달이 걸리든, 몇 년이 걸리든……. 꼭 찾을게.

 ―부탁드립니다. 분명 여기서도 저는 삶의 이정표가 되어줄 존재를 찾고 있을 테니까요. 어디에서든 그랬거든요.

 

 어느새 빛이 흩어지는 속도는 점점 빨라져, 그의 몸통 절반 이상이 사라져 있었다. 부디 건강하십시오, 나의 뮤즈. 목우람이 이레나의 목을 받치고는 그녀의 이마에 한참동안 입을 맞추었다. 모두 사라져 버릴 때까지. 그녀를 지탱하던 팔이 사라져 이레나는 카펫 위로 풀썩 엎어졌다.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그녀 외엔 그를 본 자도, 기억하는 자도 없었으니 실로 허상과도 같은 14일이었다. 이레나가 바닥을 딛고 일어섰다. 이제 나는 너와의 기억을 양분 삼아 살아가겠지. 소중하고 반짝였던 기억을 꼭 끌어안고 다시 너를 마주할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널 찾아갈 테니까…….

 

 이레나가 운동화에 발을 끼워 넣고 집을 나섰다. 눈물이 고여 있었으나 그 어느 때보다도 결연한 표정으로.

 

*

 

 하얀 드레스를 입고 백금색 머리핀을 한 이레나가 길게 심호흡을 했다. 들고있는 바이올린은 이번엔 그녀에게 딱 맞는 크기였다. 준비를 마친 바이올리니스트가 무대의 한중간으로 걸어나갔다. 관객들의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지며, 이레나는 천천히 좌중을 둘러보았다. 자신을 비추는 강한 조명 탓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네가 보고 있을지도 모르지. 이레나가 작게 마소를 지으며 바이올린을 들었다. 이레나는 그녀의 콘서트에선 첫곡으로 늘 같은 것을 연주했다. 그녀를 세상에 알린 그녀의 첫 번째 곡, 14일의 소나타. 부드러운 선율이 넓은 무대를 가득 채우고―.

 

 관객석의 한 소년이 홀린 듯이 연주자를 바라본다. 아름다운 멜로디에 그가 품고 있던 짙은 고뇌들이 씻겨나간다. 연은 연갈색의 눈동자에 새하얗게 빛나는 무대의 주인공을 가득히 담았다. 또 한명의 소년이 삶의 의미를 바로잡은 순간.

​ 초코링도넛

14일의 소나타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우람레나 동화 합작

*본 합작은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작품을 기반하고 있습니다.

​*본 합작은 1920X1080 크롬 브라우저 크기로 제작되었으며, PC열람을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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