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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책임져야 합니다. 어디로도 향할 수 없게 해버리고, 제 원망의 마음을 이토록 망가트리게 한 것을.”
짓씹듯이 뱉어내는 울분은 절절하다. 아리게 닿는다. 애달팠다. 짓누르는 살기는 짙어질수록 제 처절함을 토로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흐린 시야 너머로 어떻게든 그를, 작디작게만 보이는 소년을 제 두 눈동자 속에 담아낸다. 앳된 소년의 모습을 한 그는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였다. 표정 또한 엉망이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뒤죽박죽이었다. 본의 아닌 심정을 비추듯이 정직하게 눈물도 뚝뚝 흘리고 있었다. 확실치 않은 시야임에도 알 수 있었다. 전해졌다. 그렇지 않다면 제 뺨에 간헐적으로 닿는 눈물은 이토록 심장을 죄이게 할 수 없을 터였다.
“당신을 원망할 수 있게 해주세요.”
소중한 동료의 생을 무자비하게 앗아간 당신에게 복수하게 해주세요. 제 동료가 괴로워했던 만큼 당신이 괴롭길 바라고 있어요. 당신의 심장을, 목숨을, 잔혹하게 뺏고 싶어요. 그런데도…. 다음으로 짓씹으며 내뱉는 한마디 속에서 숨은 내용이 환청처럼 연달아 들려온다. 혼란을 담은 감정도 함께였다. 그렇기에 권레나는 그를 또렷한 초점으로 담아낼수록 직감한다. 어찌할 수 없는 심정을 품게 되었다고 한들, 그가 담아내는 소원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아마 본인도 슬슬 눈치챘을 터이며, 지금 이렇게 제 두 눈앞에서 몸을 무너트리는 게 아닐까 싶다.
쓰러지듯이 주저앉은 그의 살기도 어느 정도 사그라지는 듯했지만, 권레나를 직시하는 눈빛만큼은 아니었다. 똑바로 바라보는 두 눈동자는 언뜻 보기에 순진해 보일지라도, 노란빛을 띠는 갈색 동공이 목표로 둔 먹잇감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였다. 품속에 있는 칼을 더욱 서늘하게 빛낸다. 그러나 그는 차마 손을 댈 수 없었다. 다가설 수도 없다.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린 채 적절한 거리를 유지할 뿐이었다. 그 거리는 지극히 주관적이었음에도―.
조금 더 누그러진 살기는 경직되고 움츠러들었던 권레나의 몸을 천천히 이완시킨다. 외줄 타기를 하였던 긴장도 탁 풀린다. 온몸에 힘마저 빠져나가는 듯하다. 두 눈꺼풀도 점차 무겁게 깜박였다. 졸음기가 그득한 두 눈이 깜박이는 횟수에 따라 커다란 간격을 만들어낸다. 다시 그의 모습이 흐려지고 멀어져 보였다. 예고 없이 밀려드는 수마(睡魔)는 제 시야를 방해하며, 저항도 무용하게 하였다. 지그시 두 눈이 감겨들며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권레나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조금씩 젖어 드는 회상을 떠올리는 게 고작이었다.
*
권레나의 하루는 아침부터 조금씩 톱니바퀴가 맞물리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행운도 불행도 아닌 애매한 하루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가볍게 아침으로 계란프라이를 하려고 달걀을 깨트렸더니 쌍 노른자가 나온다든가. 샤워할 겸 우선 머리를 감으려고 보니 마침 샴푸가 다 떨어진 채라든가. 학교에서는 두고 온 교과서 때문에 당황하다, 무사히 다른 반 친구에게 빌렸다든가. 그런데 담당 과목 선생님이 쪽지 시험을 불시에 했다든가 등, 이상하고 다사다난한 날이었다.
“…너를 만나려고 그랬던 걸까.”
권레나의 시선이 손바닥만 한 바구니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어린 까치에게 향하였다. 알아듣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항상 쏟아내질 못할 퉁명스러운 불만을 슬쩍 내비쳐본다. 그래도 불운보다는 행운을 조금 더 주었으면 하는데 말이야, 하하. 그러고 보니 너도 행운의 아이라고 인터넷에서 본 것 같은데…, 이다음에 뭐가 오려는 걸까. 무척 나쁜 일만큼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치? 말꼬리를 살짝 늘리면서 실없는 소리도 이어간다. 그러다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권레나는 자신에게 오는 행운을 믿지 않는 편이었다. 지금껏 자라오는 내내 행운은 제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족 간의 관계도, 배우고 싶던 일도, 무엇 하나 잘된 일이 없었다. 결국에는 내쫓기듯이 이리 혼자서 지내게 된 꼴도 그렇고 말이다. 급격히 어두워지려는 생각에 고개를 좌우로 휙휙 움직였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그리 중얼거리면서 아직 깨어날 기미가 없는 까치를 조심스레 쓰다듬는다. 꺼칠하면서 부드러운 감촉은 제 마음을 그나마 포근하게 하였다.
한참 살살 쓰다듬다 한쪽 날개에 감긴 붕대가 문득 두 눈에 들어왔다. 심하게 다친 건 아니었다. 혹시 몰라 붕대를 감아두었을 뿐이다. 얕은 피는 묻었을지언정 흐르는 일은 없었다. 다행이었다.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내쉬어졌다. 귀갓길에 까치를 구하게 될 줄은 몰랐지…. 하고 피식 웃음을 머금고 권레나는 책상에 비뚤게 엎드린 채 검지손가락으로 까치의 머리를 툭 건드렸다. 잠투정하듯이 까치는 짧은 울음소리를 내곤 조용해진다. 입가에 그린 미소가 더 짙어졌다.
따로 어떻게 구해낼 생각은 없었다. 상황을 본 순간 구하려고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었다. 까치는 마침 구렁이에게 확실히 물리기 전이었다. 잡아먹히기 딱 그 직전이었다.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고 기다란 나뭇가지를 주워들며, 구렁이를 어떻게든 하수도 쪽으로 밀쳐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런 남다른 순발력이 있었나? 하고 의문이 들 정도로 눈 깜박할 사이에 까치를 품에 안고, 뒤돌아 집까지 뛰었다. 열심히 달렸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다친 듯해 보이는 날개를 소독하였다. 약을 발라주고 붕대를 감아주는 등 간단한 응급처치도 마저 해주었다.
어린 까치를 잡아먹으려고 했던 그 구렁이도 그리 깊은 상처를 입지 않았을 터다. 눈어림이긴 하나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도 하수도 아래로 떨어지진 않은 듯했다. 안전하게 매달려 있던 기억이 남은 채였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근처 산이 있는, 수풀 속으로 얌전히 되돌아갔길 바랐다. 이제 기억에서 떨칠 겸 권레나는 한 번 더 숨을 돌렸다. 이내 뻐근해진 몸을 바로 세우고 기지개를 켰다.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주면서 가벼운 스트레칭도 해준다. 조금 있으면 연습 시간이었다. 하루 중 제일 좋아하는 일과였다.
*
권레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아직 미숙할지라도 좋아하는 바이올린 연습을 한 뒤다. 저녁 샤워를 막 마친 참이기도 하였다. 머리를 감싼 수건이 흐트러지지 않게 한 손으로 고정하며 집안을 둘러보았다. 옆집에서는 저녁을 이르게 하는 건지 맛있는 음식의 냄새가 줄줄이 전해진다. 배고픔을 자극할 정도였다. 나도 오늘은 저 메뉴로 해볼까. 저번처럼 잘 보고 타지 않게 조절한다면 괜찮을 거 같은…. 실없는 생각을 이어가던 권레나의 발걸음이 우뚝 멈춘다.
권레나의 고개가 다시 한번 기울어진다. 난방도 함께 돌렸던가? 하나의 의문이 불쑥 들었다. 생각보다 집안이 따듯하였다. 아니면 샤워 온도를 맞추느라 집안의 공기가 조금 더 따듯해진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노곤함이 몰려들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한 가지의 의문을 떠올리니, 또 다른 의문점이 연달았다. 생각해보니 옆집에 사는 언니는 회사원이었다. 최근 야근 아니면 출장 업무에 시달리곤 해서 두문불출할 때가 종종 있었다. 오늘 일정이 일찍 끝난 건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그 언니는 대부분 인스턴트로 끼니를 때우는 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즉, 그녀는 요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음식의 냄새 근원지는 이 집안이라고 설명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권레나의 얼굴이 금세 죽상으로 변하였다.
귀, 귀신은 쥐약인데…. 울상을 짓는 권레나의 두 발이 조심조심 부엌 쪽으로 향하였다. 벽 하나를 둔 거리였기에 두 눈을 게슴츠레 뜨며 고개를 빼꼼 내밀어본다. 무기를 먼저 쥐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되돌아가서 가져오기에 이미 늦었다. 권레나는 남이 보기에 우스꽝스러울 표정으로 부엌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게슴츠레 뜬 두 눈에 먼저 들어온 건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 웬 남자의 뒷모습이었다. 언뜻 보이는 옆모습이나 키로 보아, 제 또래처럼 보였다.
무단 침입? 지금이라도 대응할 만한 무기를 들고 와도 늦지 않을까? 그 사이에 경찰에 신고하는 것도 좋겠지. 그런데 저 사람은 뭘 만들고 있는 걸까. 혼란스러워진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한 채 그의 움직임을 유심히 좇는다. 그러다 식탁에 차려진 음식들에 시선이 향하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식탁에는 제법 호화스러운 상차림이 차려져 있었다. 그 존재를 과시하듯이 윤기는 줄줄 흐르고 광택마저 반짝였다. 텍스트로만 존재하였던 문장이 현실로 나타나며 반듯함을 자랑하는 듯했다. 그만큼 꽤 먹음직스러웠다. 배꼽시계가 울리지 않았더라면 아마 더 침을 꼴칵 삼키고 종일토록 홀린 듯이 바라보고만 있었을 게 분명하였다.
눈치 없이 울린 배꼽시계에 흠칫한 권레나는 재빠르게 몸을 물렸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움직임은 불상사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법이다. 머리에 얹은 수건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잘못 디딘 두 발이 꼬인다. 그나마 다행인 건 순발력을 발휘한 손이 벽을 붙들어서 넘어지는 꼴을 면하였다는 점이다. 놀란 가슴에 손을 얹고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부스럭대는 소리가 컸던 탓일까. 무슨 일인지 확인하려는 듯 몸을 뒤돌린 그와 두 눈이 딱 마주쳤다. 또 한 번 심장이 펄떡 뛰었다. 찰나 시간도 멈춘 듯이 느껴졌다. 어찌해야 할지 모른 채 당황스러운 두 눈동자만을 어색하게 데굴데굴 굴린다. 그는 권레나를 빤히 바라보는 듯하더니, 이내 만개한 꽃처럼 화사하게 미소 짓는다. 심지어 허리를 90° 각도이자, 절도 있는 각으로 접으며 힘차게 고개를 꾸벅인다. 당황스러움이 더 가중되었다.
“제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렁찬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어, 어…? 얼빠진 소리를 내면서도 권레나는 아직 사고회로를 정상적으로 돌릴 수 없었다. 멀거니 소년을 바라볼 뿐이다. 인사하고 고개를 든 그는 되게 순박해 보였다. 그러한 인상이다. 나쁘게 말하자면 작정하고 속일 수 있을 정도로 순한…. 실례되는 생각까지 머무르게 되자, 권레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고개도 휙휙 내젓는다. 상황 파악이 우선이었다. 안 그래도 상대는 헤실헤실 웃으면서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해주었다.
“은인님께서 저를 구해주신 덕분에 보답을 하려고요.”
그 설명이 자세함을 생략하고 있는 게 문제였지만, 대강은 알아듣긴 하였다. 그는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도 줄줄이 이야기하였다. 솔직히 모두 귀에 들어온 건 아니나, 최대한 경청하였다. 놀라게 해서 죄송해요. 은인님께서 구해준 까치인데, 믿기 힘드시겠죠? 게다가 이런 것밖에 못 해 드리긴 해도 보답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음식은 입에…, 이렇게 서 있을 게 아니라 어서 드셔야 하는데…! 우왕좌왕, 허둥지둥 움직이면서 권레나를 식탁 앞에 앉힌다. 권레나 또한 얼결에 앉고 숟가락도 쥐었다. 반 숟갈 정도를 덜고 음식을 입에 담는다. 두 눈을 한 번 깜박일 동안 몇 숟갈을 더 뜬 듯했다. 어때요? 입에 맞으신가요? 그리 물어보는 그는 까치보다는 강아지를 연상케 하였다. 조금, 시선이 부담스럽다고 느낄 만큼.
요리보다는 힘쓰는 일이 더 자신 있긴 하지만요. 그렇다고 저 요리 못하는 건 아니에요!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내용이 연달았다. 그러니까 오늘은 어떤 일이든 시키시면 보답하겠습니다! 이러다 본인의 신상 정보까지 내뱉을 기세였다. 심지어는 그의 치골 부근에 두께 있는 강아지 꼬리가 언뜻 보이는 듯했다. 열렬히 흔드는 동작까지 잘 보인다. 매만지듯이 두 눈을 슬쩍 비볐다. 최근 바이올린 연습을 몰두했던 게 문제였을까. 피곤이 쌓였을지도 몰라. 한숨 자고 일어나면 꿈일 수도 있겠지. 그러한 생각을 하면서 제 뺨을 꼬집었다. 최후의 수단이었고 아팠다. 현실이라는 소리였다.
두 눈을 깜박였다. 소년의 눈꼬리가 처지며 금세 울상을 짓는 모습이 담긴다. 비에 젖은 강아지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마음 약해질 수밖에 없는 모습에 권레나의 두 눈동자가 조금이나마 흔들렸다. 자신, 있었는데…, 역시 별로이신가요? 조그맣게 웅얼거리는 목소리는 점점 힘을 잃는다. 윽, 하고 앓는 소리가 새어 나오며 양심을 쿡쿡 찔렀다. 숨을 한 번 들이켰다. 다시 밥을 뜨는 행동을 잇는다. 진심을 담아 맛있다는 단순한 답도 해주었다. 그 대답만이라도 만족하는 건지 금세 기운을 차리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이 강아지처럼 보였다. 물론 욕은 절대 아니라는 점만 주의해놓겠다.
*
양심에 굴복한 게 잘못된 일이었을까. 다 먹지도 못할 거라는 걸 알면서 허용치 양을 넘어서 버린 모양이다. 권레나는 배를 끌어안고 해쓱한 얼굴을 하였다. 음식을 더 집어 먹기에 무리라는 판단이 뒤늦게 들었을 무렵에야 겨우 수저를 놓았다. 체하지 않은 듯했지만, 아직 속이 더부룩한 상태였다. 그래도 소화 음료수를 마신 뒤에는 조금은 나아졌다. 불편한 자세를 바꿔 소파에 널브러지듯이 기대며, 한쪽 팔을 들어 올려 이마와 눈가를 함께 덮는다. 살짝 벌어진 입술 틈새로 앓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제가 미처 드실 양을 고려하지 못하고…! 라며 안절부절못하는 목소리에 권레나의 고개가 절로 그에게로 향하였다. 곧 고개가 내저어진다. 둥그런 두 눈동자도 슬며시 드러난다. 부드럽게 접힌 눈매는 괜찮다는 의사를 담고 있었다. 우람, 아? 조심스레 그의 이름도 불러본다. 식사하는 내내 ‘저기’ 혹은 ‘까치씨’라고 부르기에는 어색하여 통성명이라도 미리 했었다. 머릿속 한편으로는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하였지만.
본인의 이름이 불리니 주인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다 목소리를 알아듣는 강아지처럼 그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금세 시야의 차이가 생긴다. 그렇지만 반 발자국 좁혀진 거리와 고개를 젖힌 상태라서 그런지 그의 시선을 똑바로 받아낼 수 있었다. 불이 꺼진 거실이었음에도 스며든 달빛이 그의 실루엣을 확실히 비춰주었다. 문득 살며시 접어드는 눈매를 빤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어딘지 모르게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아직도 속이 안 좋으신가요? 방까지 부축이라도…. 걱정이 담긴 말은 한없이 다정하였으나, 무언가를 놓친 듯이 기이하게만 다가온다.
이상하게도 소름이 돋는다. 등은 조금씩 땀으로 젖어 든다. 이러한 위화감을 없애려는 건지 졸음이 슬쩍 오는 듯했지만, 애써 밀어내었다. 무언가를 눈치챈 듯 가늘어지는 두 눈동자는 점점 목적을 띠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달빛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샛노랗게 물든 듯한 동공이 찰나 스쳐 지나간다. 의아함에 고개를 기울이는 사이 그의 뒤쪽으로 반쯤 열린 제 방이 두 눈에 들어왔다. 의도적으로 보려던 건 아니었다. 단순히 시선이 그리로 향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책상 위 바구니 안에 잠들어 있는 까치를 확인한 순간……,
어, 라…? 얼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권레나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튼 그는 뒤쪽을 확인하였다. 이내 한 발자국의 움직임만으로 시야를 차단한다. 아아, 들켜버렸나요. 전혀 곤란하지 않고 여상한 어조다. 태평해 보였다. 다른 쪽으로 시선을 굴리며 머리를 짧게 긁적이다 쓸어 넘긴다. 그 일련의 동작에서 귀찮다는 기색이 묻어 있었다. 그럼에도 왠지 힘이 들어간 듯해 보였다. 더 속아 넘어갈 줄 알았는데, 저게 변수가 될 줄이야. 계획 중 일부인 것도 맞지만요. 다시 권레나에게로 향한 시선이, 두 눈빛은 심상치 않다는 걸 알려준다. 조금 전의 상황은 거짓말이라는 듯이 전혀 다른 태도였다. 권레나를 바라보며 짙어지는 미소는 마치 뱀을 연상케 하였다.
“…아프지 않게 할게요. 그러니 당신의 목숨을 주시겠어요?”
내 복수로써. 두서없이 덧붙어지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하나, 권레나를 바라보는 두 눈동자에선 서서히 살벌함을 띠고 있다. 무슨…, 당황한 심정은 혀를 꼬이게 하고, 숨도 어느새 덜컥 막혀 들게 한다. 연달아 잔기침을 토해낸다. 동시에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제게 몸을 기울여 오는 행동은 섬뜩하게만 느껴진다. 언제 붙잡혔는지 모를 왼팔을 빼내려고 바르작거려도 소용없다. 생각보다 악력이 세다. 눈살이 찌푸려졌다. 우…, 람아. 달싹인 입술이 도움을 요청하듯 그의 이름을 조심스레 담는다. 그다지 효과는 없었지만.
네. 당신께 알려드린 제 이름이죠. 계속 불러주셔서 감사해요. 그의 두 눈이 지그시 내리감기다, 바로 내리뜨는 행동은 단조롭다. 평이하였다. 그럼에도 부드럽게 휘는 눈매가 위험스럽게 반짝인다. 어느덧 완연히 샛노랗게 물든 두 동공은 그가, 목우람이 뱀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일부러 뱀의 피부도 드러낸다. 그러곤 조금 더 몸을 겹치듯이 혹은 품에 끌어안기라도 할 듯이 소파 위로 한쪽 무릎을 세워 더 거리를 좁힌다. 이렇게 하면 도망친다 한들, 금세 붙잡을 수 있다는 교만함이었다.
서서히 죄일 듯이 다가오는 또 다른 손은 왠지 모르게 느릿하게 다가오는 듯해 보인다. 그러나 목적은 확실히 가진 채다. 권레나는 그 손이 단번에 제 목을 비틀어버릴 듯한 두려움이 엄습하였다. 상상되었다. 창백하게 질리는 모습을 즐기듯이 관람하는 눈웃음이 짙어진다. 고개는 서로의 숨이 섞일 만큼 가까워진다. 권레나의 귓가로 조금 더 옮겨간 입술이 달콤하게만 들리는 속삭임을 건넨다. 저에게 모두 맡기시면 돼요. 그 속삭임은 권레나를 퍽 위로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연인에게 마지막 이별을 고하는 태도처럼 느껴졌다. 그러한 착각을 들게끔 하였다. 잠깐이라도 권레나는 그대로 제 목숨을 내어줄 듯이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그러나 오히려 바싹 긴장한 몸은 정신을 일깨워주었다. 번뜩이는 정신 속에서 시간을 끌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제 팔을 쥐고 있는 악력이 느슨해질 정도까지, 딱 그 정도만이라도 괜찮다. 긴장으로 침을 삼킨 권레나의 두 눈동자에 작은 이채가 서리다 빠르게 사라졌다.
“…이유를, 물어도 될까?”
곱지 않은 시선으로 직시하는 샛노란 두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 바라본다. 질문을 담아낸 입술은 망설이듯이 한 번 달싹이다 굳게 다물렸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다. 이어 으음, 하고 말꼬리를 살짝 끄는 소리가 들렸다. 딱히 지체할 이유가 없는 답은 목우람이 예상한 질문이었기 때문일 터다. 당신이 제 소중한 동료의 목숨을 잃게 했기 때문이죠. 다만 여상하다는 투로 흘러나온 내용은 권레나의 기억을 살리지 못하였다. 이를 눈치챘기에 덧붙이는 내용에선 그의 감정이 담기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제 친구이자, 소중한 동료였습니다. 당신은 그저 저 까치를 구하려고 했을 뿐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희도 먹고살아야 하는 자들인걸요. 약육강식 세계의 법칙이란 게 있잖아요. 그러니 당신은 구하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구했더라도 제 동료의 목숨을 위협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랬더라면 혹은 조금이라도 더 주시했더라면! 그리 허무하게 가지 않았을 테고, 그저 오늘은 운수가 좋지 않은 날이라며 목숨만큼은 건져낼 수 있었겠죠. 그런데도 그는……. 실로 억지가 섞인 비난이었다. 아래로 향하는 시선이 그의 심정을 대변하였다. 이와 대비되듯이 창백한 혈색임에도 권레나의 표정은 열쇠를 쥔 듯이 점점 단단해진다. 목우람은 이를 눈치채지 못한 채 제 목적을 다시 한번 입안에 머금었다.
“그러니까, 나는 당신의 목숨이 필요해요.”
다시 치켜든 고개는 사납고 형형하게 빛나는 두 눈동자를 드러내었다. 권레나는 몸을 움찔 떨었으나, 다시 천천히 열리는 입술은 확고하게 움직인다. 우람이는, 나를 죽이지 못할 거야. 제 직감이었다. 직감만으로 그리 답하였을 뿐이다. 그 답이 도발이라도 된 건지 느슨해지려던 악력이 가해진다. 과연, 어떨까요. 목소리에도 힘이 실린다. 떨어트렸던 거리는 또 한 번 좁혀진다. 이제는 서로 몸이 밀착될 만큼 가까울 거리였다. 그러나 더는 움직이지 못하였다. 언제 깬 건지 모를 까치가 목우람의 주변을 맴돌았고, 짹짹대는 소리를 내며 방해하였다.
이런 어린 녀석은 꺾기 쉬워요. 그런데 이 아이는 생각보다 겁이 없는가 봐요. 그리 중얼거린 목우람은 까치를 제 한 손에 금세 붙잡는다. 일부러 살살 쓰다듬는 손길은 두 눈을 뗄 수 없게 하였다. 조마조마하였다. 조금만 힘을 준다면 그대로 바스러트릴 듯해 권레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러한 모습을 힐끔 곁눈질한 눈웃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제 목적은 오직 당신뿐이라, 이런 약한 생명은 건드리지 않아요. 얌전히 돌려보낼 줄 거예요. 그래도 당신에게서 떨어질 수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면서 고민하는 듯했으나, 그리 고민되는 눈치로 보이지 않았다. 뭐, 이렇게 하는 게 제일 무난하겠네요.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목우람은 까치를 근처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마치 마법이라도 쓴 듯이 까치는 그새 다시 잠들어 있었다.
방해꾼은 사라졌고, 시간이 되었네요. 그린 듯한 미소는 그리 말해주는 듯했다. 그 사이에 권레나는 제 머릿속을 어떻게든 팽팽히 돌렸다. 빠져나갈 수단을 하나둘씩 떠올려본다. 다시금 약해진 악력 또한 신경 썼다. 그럼에도 다른 쪽으로 쏠리는 시선만큼은 애써 참아낸다. 자신에게 한시도 떨어지지 않은 두 눈동자를 오직 바라보았다. 더욱 또렷한 빛을 띠었다. 우람이는 날 죽이지 못해. 다시 한번 같은 내용을 달싹인다.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확고하다.
“…할 수 있었다면.”
아마 진즉에 했을 거야. 그렇지 않아? 그리 덧붙이는 입꼬리가 위로 향한다. 의도치 않았으나, 승리자의 미소에 가까웠다. 확신 어린 어조에 즐거움을 담은 표정이 온기를 서서히 지운다. 그렇다면 증명해 보이면 될까요. 아, 증명하면 당신이 확인할 방법은 없겠지만요. 나긋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와 달리 권레나를 바라보는 두 눈빛은 이전보다 더 서늘해진다. 짓누르는 살기도 짙어진다. 짙어진 살기는 권레나의 목을 죄듯이 압박하였다.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상하게도 집안에서 선선한 바람도 불기 시작하였다. 바람은 잠시간 두 사람의 머리칼을 흩트리다가 이내 가라앉는다.
이 지점이 권레나에게 기회라는 걸 눈치챘다. 제가 먼저 움직여야 할 타이밍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렇지만 그에게 저지당할 듯해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목우람이 제 말에 흔들리길 바랐다. 두 눈을 질끈 감고 기다렸다. 아득하게 느껴질 짧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에게서 어떠한 말도 행동도 없었다. 그렇기에 두 눈을 슬며시 떴고, 곧바로 곤란함으로 물든 모습이 보였다. 하, 하고 헛웃음을 함께 터트린다.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듯이 쓸어내리는 손짓은 초조함을 담는다. 손가락 틈 사이로 드러난 표정과 입술은 욕설이라도 내뱉고 싶은 심정을 내비치고 있었다. 짧게나마 스쳐 지나간 모습이었기에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권레나의 팔을 쥐고 있는 손이, 여전한 악력 속에서 작은 떨림을 조금씩 전해주었다.
목우람은 그 자리에 목석처럼 가만히 있었다. 여전히 흘러나오는 말은 없고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고민에 빠진 듯이 표정이 점차 일그러질 뿐이다. 침묵이 길어지는 가운데 째깍째깍 울리는 시계 소리는 재촉하듯이 느껴진다. 이는 초조함을 안겨주기에 충분하였다. 지금, 내가 망설이는 건가? 조용하고 얇은 종잇장 같은 목소리는 혼란스러움을 담고 있다. 권레나의 시선이 목우람에게로 향하였으나, 그는 눈치채지 못하였는지 뒤로 한 발자국 반 정도의 거리를 둔다. 붙잡힌 손에는 더는 힘이 들어가지 않은 채였다. 이내 허탈함을 담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하, 하….
“…당신, 말이 맞네요.”
그, 렇네요. 저도 알고 있던 거 같아요. 그저 모른 척했을 뿐입니다. 이어지는 건 항복과 다름없는 수긍이다. 권레나를 살벌하게 바라보는 두 눈빛은 옅어진다. 짓누르는 살기만큼은 그대로였으나, 전보다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그런데도. 하고 덧붙이려다 다문 입술이 어쩐지 씁쓸해 보였다. 그럼에도 그 한마디 속에 담긴 원망을 눈치챈다. 이전과 다른 방향의 원망이었다. 어느덧 갈색으로 되돌아온 두 눈동자는 그리 말해주고 있었다.
“당신의 연주를 듣지 말았어야 했어요.”
단순한 초보 연주라며 듣고 넘겼어야 했습니다. 아니면 집안에 침입한 그 순간부터 당신의 목숨을 노리는 게 답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러지 않았어요. 당신을 방심하게 할 수 있을뿐더러 조금 더 곤란하게 하고, 일그러진 모습을 찬찬히 즐기자는 이유를 덧붙였습니다. 지금 이렇게 되짚어보니 제 오만함이었나 봐요. 입이 쓴지 목우람은 제 입가를 씁쓸히 매만진다. 다른 한편으로는 당신의 연주를 듣고 측은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기교가 부족하고, 어색한 초보자의 실력인데도 어째서 그런…, 외로운 걸까. 슬픈 감정이 느껴지는 걸까. 제일 궁금했던 겁니다. 더 듣고 싶어졌습니다. 단지 그 연주만으로 이미 저를 흔들어놓은 거였죠. 동시에 당신을 향한 원망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을 원망할 수 있게 해주세요.”
곤란하고 당혹스러운 듯한 표정이 권레나를 향하였다. 지그시 깨문 입술은 떨림을 감추지 않는다. 울분이 섞인 책임도 전가하였다. 조금씩 붉게 달아오르며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건 아랑곳하지 않은 채다. 상기된 호흡 속에서 그저 토로할 뿐이다. 조금 더 거리를 벌리며 바닥으로 몸을 무너트릴 뿐이다. 그럼에도 목우람의 두 눈동자는 권레나를 담아내었다. 제 복수의 목표를 놓칠 수 없어 하면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실로 어디에 초점을 맞춘 건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음에도―.
한참의 대치 끝에 서서히 그를 담아내지 못하는 시선을 문득 느낀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자신 또한 권레나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제 호소를 하느라 눈치채지 못하였다. 저를 향한 시선에 담긴 의미도 뒤늦게 알았다. 또다시 모른 척하려고 했을 뿐이라는 점을 다시금 자각하였다.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을 마주한 기분이다. 절로 제 가슴을 쥐는 손에 바싹 힘이 들어간다.
이제는 의식을 잃은 권레나를 바라보아도 해답이 나올 리 없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두 눈동자는 방황한다. 귓가에는 그녀의 연주가 들려오는 듯했다. 날카롭게 찢는 파열음이 제 기억과 다르다. 물론 그녀가 그런 연주를 했다는 건 아니다. 권레나의 연주는 오히려 순수하였다. 맑았다. 억눌린 슬픔이 담겼으나, 깨끗한 울림을 가졌다. 그렇기에 지금 제게 들리는 소리는 아마…….
지금이 기회야, 정신 차리자. 일부러 생각을 돌린다. 일어서려는 두 발이 비틀거렸다. 몸을 움직이며 잠든 그녀에게 다가섰다. 다시 샛노래진 목우람의 두 눈동자가 가늘어진다. 시선은 꽤 오랫동안 머물렀으며, 잔잔하게 일렁이다 침잠한다. 이내 망설임을 털어내려는 듯이 손을 뻗었다.
*
졸린 기운을 담은 두 눈이 깜박인다. 따가운 햇볕이 두 눈을 마저 찔러 든다. 뒤흔드는 두통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소파에서 그대로 잠들어버린 탓인지 몸이 꽤 뻐근하였다. 왜 여기서 자고 있었던 거지…? 의아함에 차근히 어제 일을 되짚어본다. 그러나 제 생각을 방해라도 하듯이 두통이 다시 일었다. 애써 참아내며 눈가를 찡그린다. 주위 또한 살펴보았다. 마침 제게 덮인 담요가 흐트러지며 떨어진다. 고개가 기울어졌다. 담요를 가지고 올 정도로 여기서 잠들었던 걸까. 아무리 되짚어보아도 흐릿한 기억은 어제 일을 제대로 상기시켜주지 않는다.
결국, 기억을 되살리는 건 포기하고, 기지개를 한 번 더 켜며 주위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제 시야에 문득 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탁자 위에 찢긴 종이였다. 곧바로 종이를 집어 든다. 어째선지 제 것이 아닌 낯선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권레나 혼자 있을 뿐인데도―. 종이의 뒷면은 당연하게도 백지였으며, 자연스레 앞으로 돌려 글자에 시선을 둔다. 이내 권레나의 표정이 다시 찡그려진다. 끝에 지운 듯한 자국이 있었지만, 적힌 글자는 뜻을 헤아릴 수 없는 메모였다.
당신이 살아가는 내도록 불운이 깃들기를―.
그럼에도.
다만 잊지 말라는 듯이 꽤 오랫동안 바라보게 되는 글귀였다.
맺는 원망, 지는 원망